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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행 20년, 현대미술의 문턱을 낮추다

제 993 호 발행일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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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마 많은 사람이 ‘어렵다’ 혹은 ‘난해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미술관의 작품들은 종종 관람객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며, 예술과 일상 사이에 높은 장벽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환기하고 익숙한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사고 확장의 장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은행’ 제도는 바로 이 기능을 일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작됐다. 지난 20년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공공기관과 일상 공간에 대여하며 현대미술 감상의 문턱을 낮춰온 미술은행. 오는 7월 3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리는 20주년 특별전 〈돌아온 미래: 형태와 생각의 발현〉은 미술은행 20년의 궤적을 확인하는 자리다.

  입장권은 별도 비용 없이 매표소에서 바로 받을 수 있다. 입장권 수령 후 엘리베이터 입구에 설치된 QR코드로 입장을 확인하고 3층으로 향하면, 개방 수장고가 바로 이어진다. 3층 개방 수장고 입구 벽면에는 하늘색의 굵은 글씨로 ‘돌아온 미래’가 적혀 있고, 그 위로 주황색 글씨가 아치형으로 배치돼 전시 제목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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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물질과 흔적, 감각의 생성

  본격적인 전시에 앞서 프롤로그에 제시된 미술은행 제도 설명은 전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미술은행 제도를 처음 접하는 관람객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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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에서 가장 먼저 발걸음을 붙잡은 건 이배 작가의 <불로부터>였다. 숯으로 구성된 화면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재료의 질감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관람객들이 작품에 눈을 바짝 대고 캔버스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 작품에서 숯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소멸과 변형의 과정을 거쳐 불필요한 요소가 제거된 가장 기본적인 상태로 환원된 물질이다.
  보통 그림을 그릴 때 잘 사용하지 않는 숯을 작품의 주요 매체로 내세운 것은 작가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재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덕분에, 평범한 숯은 이 작품만의 특별한 의미가 됐고, 작품의 가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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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을 따라 걷다 또 한 번 발걸음이 멈췄다. 이강소 작가의 <허-15005>다.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의 발이 바삐 움직이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형태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반복되는 붓질의 방향과 겹친 흔적들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듯한 속도감을 만들어냈다. 형상이 일정하지 않아 보는 위치에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을 거 같아 여러 각도에서 관찰했지만, 회화는 평면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시선에 따라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보는 이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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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끝자락에서는 정상화 작가의 〈무제(1987)>가 시선을 붙잡았다. 창문 사이로 비치는 나뭇잎 그림자가 흔들리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결들이 겹치며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연상시켰다. 캡션을 확인하니 종이에 프로타주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거친 표면 위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질감을 옮겨내는 방식 특성상 형태의 경계가 뭉글하게 표현되는데, 그 효과가 멀리서 보면 수채화 물감이 번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설명을 보지 않았더라면 수채화로 착각했을 것이다. 관람객이 표현 방식을 직접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도록 이끄는, 능동적인 감상 경험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1부의 작품들은 명확한 형상 대신 재료와 흔적, 반복의 과정을 통해 감각을 형성한다.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하면서도 결과보다 과정과 개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전시 주제인 ‘형태와 생각의 발현’과도 맞닿아 있다.

2부: 기록의 축적과 재해석의 흐름

  2부 공간은 1부보다 아담하다. 대신 작품이 걸린 벽의 반대편에는 다양한 도서들이 빼곡히 채워져 도서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러한 공간 구성 덕에 1부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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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에서 특히 눈에 들어온 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 나란히 배치된 구성이었다. 위에 걸린 박남철의 <무천-7>은 목천에 수간채색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나무 틀 위에 천을 씌운 단단한 바탕에 물에 풀어 사용하는 안료를 여러 겹 쌓아 올린 깊이감과 은은한 색감이 특징이다. 점과 기호들이 겹겹이 쌓인 화면은 별자리처럼 이어져 보였고, 사슴처럼 보이는 형상은 밤의 숲을 조용히 거니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아래 조상근의 <순환>은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번지듯 퍼지는 색채와 부드러운 윤곽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색감과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같은 작가의 연작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2부는 전반적으로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회화가 주를 이루며 각자의 해석을 열어 둔다. 함께 관람하는 이가 있다면 서로 떠올린 이미지를 나눠보는 것도 또 하나의 감상 포인트다.

3부: 기억의 재구성과 도시의 대화

  2부를 벗어나자 전시장 중앙에 놓인 하얀색 반원형 의자와 파란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이 시선을 끌었다. 스크린에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영상이 길어지자, 몇몇 관람객이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감상하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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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꼴라쥬플러스(장승효·김용민)의 <슈퍼내이처&힙나고지아>는 환상 속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한 몽환적인 영상미가 압도적이다. 영상은 서양식 돔 구조 건물과 하얀색 기와지붕의 설치물이 하나로 겹치며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준다. 동서양 건축물의 중첩은 경계가 사라진 공존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에서 어우러지는 모습은 우리의 감각을 다시 깨우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리플릿 설명을 보니 우리를 둘러싼 도시와 미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특히 이 작품들은 코로나19로 문화생활이 어려웠던 시기에 지친 사람들에게 예술을 통한 휴식을 전하고자 기획됐다. 눈을 즐겁게 하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결국 삶을 다독이는 위로의 메시지로 이어지는 셈이다.
  3부의 조화로움은 공간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스크린 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벽면 일부가 창처럼 개방돼 1부의 작품까지 함께 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서로 다른 섹션이 물리적으로 관통되는 이 구조는 전시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장치로 작동한다.

관람객의 시선

  기자보다 전시를 미리 관람한 우리 학교 김민건(고고미술사학과·24) 학생은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작품을 아우르는 구성 덕분에 시대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상 깊었다”라는 소감을 전하며, 미술은행 제도에 대해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미술시장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그는 “전시가 미술은행 제도를 설명하려는 것인지, 소장 작품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다”라며 “특히 3부가 별도의 섹션으로 구성된 이유가 명확히 와닿지 않았다”라고 아쉬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뿐 아니라 현대미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들에게 입문 전시로 추천하고 싶다”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현대미술이 낯설게 다가오는 건 일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동시대의 가치와 문제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미술은행은 지난 20년간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작품을 수집해 공공기관과 문화시설에 대여.전시하며 미술 문화의 대중화를 이끌어 왔다. 그 행보는 현대미술의 중심이 작가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에서 관람자의 주체적인 해석으로 이동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작품 앞에서 ‘이건 어떤 화법으로 그려진 걸까’ 하고 궁금증을 품고 캡션을 찾아보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감상의 방식이다. 어렵고 추상적으로만 보이던 현대미술이 사실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풀어낸 결과물임을, 이 전시는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박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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