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청년들은 거리로 나섰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광장을 채운 그 청년들의 행동은 결국 역사를 바꿨다. 4·19 혁명은 특정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는, 청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능성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년인 대학생들은 어떤 불의를 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이 물음에서 이번 기획이 시작했다. 4·19의 정신을 강의실에서 배우는 대신, 캠퍼스 한편에 참여형 패널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직접 물었다. 포스트잇 한 장에 담긴 대답들이 2026년 청년세대의 솔직한 목소리가 됐다.
개신인에게 묻다: 당신이 느끼는 불의는 무엇입니까?
패널에 적힌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식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패널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담겼다. ▲취업 시장의 구조적 불공정 ▲젠더 불평등 ▲기후 위기에 무관심한 정책 ▲청년 주거 문제 ▲수도권 인프라 집중 등 지금 이 캠퍼스를 걷는 학생들이 일상에서 몸으로 느끼는 부조리들이었다. 그리고 기자는 목소리를 내준 두 학생을 만났다.
“돈보다 더 아픈 것 — 내 존재가 무시당하는 느낌”
이도경(화학공학과·25) 학생이 포스트잇에 적은 불의는 ‘인정의 불의’다. 물질적 불평등도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기여와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부조리라는 것이다. “돈이 없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다른 차원의 고통이에요. 그건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사회에 대한 분노로 쌓여가거든요.”
그가 말하는 불의는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에 있었다.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직원이 건네는 친절을 당연한 서비스로 여기며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물건만 집어 가는 뒷모습. 그 순간 직원은 ‘사람’이 아닌 ‘물건 전달 기계’가 된다고 그는 말했다. “역할 뒤에 숨겨진 사람을 보지 못하는 순간들이요. 그게 제가 가장 자주 목격하는 부조리예요.”
그렇다면 개인의 행동이 이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이도경 학생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상은 한 번에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며 바뀐다고 했다. 그 균열은 아주 사소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내가 오늘 마주친 분께 진심으로 인정을 건네면, 그분도 다음 사람에게 더 따뜻하게 대할 가능성이 높아지잖아요. 작은 존중이 연쇄적으로 퍼져나가는 거죠. 저는 그걸 믿어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도경 학생이 말하는 ‘행동’의 성격이다. 그것은 시위나 서명운동 같은 가시적 실천이 아니다. 눈을 마주치는 것, 이름을 불러주는 것, 감사를 말로 표현하는 것. 너무 작아서 ‘행동’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것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핵심일 수 있다. 인정의 불의는 거대한 제도가 아니라 수십억 번의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서 매일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균열 내는 것도 결국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행동일 수밖에 없다. 이도경 학생의 실천론은 소박해 보이지만, 문제의 뿌리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왜 모든 것이 서울에만 있어야 하나요”
김예린(주거환경학과·25) 학생이 적은 불의는 ‘수도권 인프라 집중 문제’다. 대학 입시를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었다. 결국 모두가 인(in) 서울을 원하는 구조, 그 배경에는 좋은 기회와 인프라가 전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현실이 있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느꼈는데, 결국 모두가 인 서울을 원하잖아요. 학교 때문만이 아니라, 좋은 기회와 인프라가 전부 서울에 몰려 있으니까요. 콘서트만 해도 주요 공연은 거의 다 수도권에서 열리고, 교통 접근성도 차이가 크죠.”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적으로도, 기회의 면에서도 출발선이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그가 느끼는 구조적 불의였다. 이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삶의 가능성 자체가 달라지는 불평등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관적이지 않았다. 그는 “조그마한 행동이 큰 물결을 불러올 수도 있다”라고 믿는다. 지금 당장 구조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문제를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김예린 학생의 말에서 눈여겨볼 것은 ‘인식’과 ‘목소리’를 이미 실천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적 불의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은 흔한 반응이다. 그러나 김예린 학생은 그 무력감을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로 정의했다. 문제를 언어화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 이번 패널에 포스트잇을 붙인 행위 자체도 그 연장선이다.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여론이 되고, 여론이 쌓여 정책을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여러 사회운동이 증명해 온 경로다. 김예린 학생은 그 경로의 가장 첫 번째 지점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었다.
포스트잇이 붙지 않은 자리들
두 학생의 불의는 달랐다. 한 명은 일상의 관계 속 인정의 문제를, 다른 한 명은 지역 간 기회의 격차를 말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 고민해 온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번 패널이 그 생각을 처음으로 밖으로 꺼내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기획의 또 다른 얼굴은 참여율이었다. 패널은 학생들의 일상 동선에 놓였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포스트잇을 집어 든 학생의 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단순히 ‘무관심’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취업 준비, 학점 관리, 생계형 아르바이트.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사회 문제를 소리 내어 고민할 여유 자체가 구조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내 한마디가 과연 의미 있을까’라는 회의감, 공론의 장에 참여해 본 경험의 부족도 패널을 외면한 요인일 것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낮은 참여율은 청년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기회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진 구조의 문제다. 포스트잇 한 장을 붙이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5분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그 5분조차 허락하지 않는 일상의 밀도에 있다. 오늘의 청년들은 스스로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세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문제에 반응할 의지는 있음에도, 그것을 표출할 시간과 공간이 박탈된 것은 아닐까.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여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포스트잇이 붙지 않은 빈자리는 무관심의 증거가 아니라, 청년들을 둘러싼 구조적 압박의 흔적으로 읽혀야 한다.
4·19의 청년들이 광장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독 용감해서가 아니라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청년들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아직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 고립일 수 있다. 포스트잇이 붙지 않은 빈자리들도, 그것대로 지금 청년세대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포스트잇에서 시작하는 것들
이번 기획이 의도한 것은 4·19 혁명을 기념하거나 오늘의 청년세대를 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이 어떤 불의를 느끼는지, 그 목소리를 시각화하고 실천 가능성을 함께 탐색하는 것이었다.
이도경 학생은 눈을 마주치는 것에서, 김예린 학생은 작은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고 했다. 둘의 말은 방향이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불의를 인식한 개인이 일상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 그것이 쌓여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간다는 믿음이었다.
포스트잇 한 장은 작다. 그러나 그 위에 적힌 문장들은 2026년 대학생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4·19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다’라는 태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 정신은 광장이 아니어도, 포스트잇 위에서도, 눈 마주침 하나에서도 계속될 수 있다.
패널은 내려졌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느끼는 불의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조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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