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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보다> 여름이라는 유예기간,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제 994 호 발행일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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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퍼스에 종강의 공기가 감돈다. 누군가에게는 해방의 시작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방학이라는 막막한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다. 학기 중에는 짜인 시간표와 학점이라는 명확한 목표 속에 일상이 돌아가지만, 방학이라는 텅 빈 시간에 던져진 대학생들은 문득 길을 잃곤 한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여름 이야기>는 바로 이 찬란하고도 불안한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청춘들의 서투른 여정을 비춘다.
  영화는 수학 석사 학위를 받았지만 음악이라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 ‘가스파르’가 여름 휴양지 브르타뉴 해변을 찾으며 시작된다. 그는 원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연인 ‘레나’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는다. 홀로 남겨진 유예의 시간 동안 가스파르는 해변에서 민족학을 전공한 ‘마르고’를 만나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고, 또 다른 매력적인 여인 ‘솔렌’을 만나며 순식간에 세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연애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로메르 감독은 이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20대 청춘이 마주하는 진로와 인간관계의 불안을 들여다본다. 영화 속 마르고는 박사학위를 가졌음에도 해변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식당 직원이 본업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가스파르에게 마르고는 웃으며 말한다. “많은 학생이 방학 때 일하니까. 돈 중심으로 내 인생을 계획하긴 싫거든.” 당장 거창한 연구 자리가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신이 탐구하고 싶은 삶의 현장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태도다. 취업 스펙과 경제적 가치만을 향해 질주하도록 요구받는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마르고의 대사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돈과 효율의 논리에 여름방학을 맡기고 있는가.
  반면 내면의 중심을 잡지 못한 가스파르는 진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누구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한 채 갈등하는 그는 마르고에게 “여러 명과 있을 때의 내 유일한 문제점은 의사소통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야.” 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흔히 관계에서 갈등을 겪을 때 대화의 기술을 고민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기술’만이 아니다. 집단 속에서 ‘내가 나로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주체성의 문제다. 가스파르가 유약하게 방황했던 이유 역시,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만 자신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와 내 진로라는 두 축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던 가스파르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극적인 선택을 내린다. 세 여자 모두에게서 연락이 와 선택을 강요받던 순간, 우연히 삼촌이 구해주기로 한 음악 녹음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결국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음악을 위해 배를 타고 황급히 해변을 떠나버린다. 얼핏 대책 없는 도피처럼 보이지만, 이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관계의 굴레를 과감히 뒤로하고 비로소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이렇듯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다가도, 결국 모든 것을 제쳐두고 내 꿈을 향해 배에 올라타는 과감함은 어쩌면 오직 20대 청춘에게 허락되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흔들리지만, 그 유약한 방황 끝에 내리는 주체적인 선택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은 단지 다음 학기를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스펙을 보충하는 ‘멈춤’의 시간이 아니다. 내 가치관을 중심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타인의 시선 전에 내 지탱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고민하는 ‘유예와 모색’의 시간이다. 이번 방학에는 학점과 스펙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이번 여름, 무엇을 중심으로 계획하고, 타인 앞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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