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제1학생회관(E3) 3층.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용원의 상징인 삼색 봉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이봉철 명장 바버샵’. 그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이용원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포근한 샴푸 향과 함께 사각사각 가위 소리가 손님을 맞이한다. 거울 앞 의자에는 손님이 앉아 있고, 그 뒤로는 가위를 들고 묵묵히 머리를 다듬는 한 남자가 서 있다. 올해 일흔세 살, 이봉철 명장이다. 우리 학교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1986년이니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의 이야기는 오래전인 14살 소년 시절부터 시작됐다.
14살 소년에서 73세 장인까지, 이봉철 명장의 이발 인생
“그때는 집안 사정이 어려웠어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밥 얻어먹고 옷 얻어 입으며 기술을 배웠죠. 봉급도 없이 일만 했어요.”
이봉철 명장은 14살 소년 시절, 집안 형편을 조금이라도 보태고자 이발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서울의 한 이용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기술을 배웠다. 봉급 한 푼 없이 3년간 묵묵히 쌓은 기초는 결국 삶의 일부가 됐고, 꾸준히 기술을 쌓아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1974년, 19세의 나이에 전국 기능경기대회 금메달을 거머쥔 그는 이후 1975년 제22회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기능올림픽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비록 가슴막염(늑막염)으로 세계 무대는 밟지 못했지만, 좌절 대신 꾸준함을 선택했다. 1978년 처가가 있는 청주에 터를 잡았다. 1980년 자신의 첫 이용원을 열고 명성을 쌓다가, 1986년 우리 학교 학생회관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학생과 교직원의 머리를 정성스레 다듬어왔다.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해 이발에 임한다. “머리를 잘못 깎으면 손님이 어디서든 평가받아요. 그래서 언제나 꼼꼼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손님이 있어야만 내가 있는 거죠. 제아무리 기술이 있어도 손님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장인정신을 드러냈다.
이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묻자, 그는 1990년대를 떠올렸다. 당시 장발 유행으로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절을 호탕하게 웃으며 회상했지만, 마냥 주저앉진 않았다고 전했다. 시대의 흐름을 살피며 헤어스타일을 연구했고,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짧은 머리 유행이 돌아오자 이용원은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세대를 이어 손님을 맞이할 때였다. “어떤 교수분이 이용원에 올 때마다 데려온 아들이 있었어요. 그 꼬맹이가 매번 ‘봉철이 아저씨, 봉철이 아저씨’ 하면서 반겼었는데 그 애가 커서 자기 아들을 데려오고 있더라고요. 이제는 ‘명장님, 명장님’ 하면서 반기고 있는 걸 보면 세대를 이어서 내 이발이 전해지고 있다는 게 실감 돼요”
이봉철 명장은 대통령상과 충청북도 명장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만하지 않고 항상 초심을 생각한다. “꾸준함이 제 원동력이자 자부심입니다. 건강을 지켜가며 학생들의 머리를 다듬고 싶어요. 그렇게 쭉 살아가는 게 제 소망입니다.”
그의 가위질에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삶과 예술, 그리고 시간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이봉철 명장(오른쪽)과 아들 이연재 씨(왼쪽).
믿음과 약속으로 이어지는 가위, 아들 이연재 씨
이봉철 명장의 옆에는 토요일마다 아들 이연재(45) 씨가 함께한다. 그는 평일엔 자신의 이용원에서 일하고 주말엔 아버지를 찾아온다. 여러 직장을 거쳐 다양한 삶을 경험했었지만, 그는 결국 아버지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자기 기술로 삶을 산다는 것이 가장 보람 있다는 걸 직장 생활을 하며 깨달았어요. 처음엔 막연했지만 10년 넘게 일하며 ‘잘 선택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연재 씨가 정의하는 미용 철학은 ‘믿음과 약속’이다. “손님이 다시 찾아오는 건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만족을 돌려드리는 것이 저의 약속입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첫 단골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제가 드린 만족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러면서 손님에 대한 끊임없는 책임감을 느껴요.”
‘가장 선호하는 머리 스타일’을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용사는 특정 스타일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손님을 유도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머리를 권할 위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손님을 중심에 두고 유연하게 접근하는 게 원칙입니다.”
이연재 씨는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서 가위를 잡으며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아버지 밑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토요일마다 도우면서 기술뿐 아니라 손님을 대하는 마음도 배우고 있어요.”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 신뢰와 약속을 중시하는 이발사로서의 철학이 세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1,200원이던 교직원 이발료, 800원이던 학생 이발료는 세월이 흘러 10,000원이 됐다. 하지만 이 명장의 가위질은 변함없다. 반듯하게 정리된 도구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 그리고 상처로 가득한 손에 들린 가위. 사각사각 울리는 가위질 소리 속에, 손님들은 단정한 머리와 함께 세대를 이어온 장인의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돌아간다.
김동건 기자
dongard@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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