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0주년, 새로운 도약과 위대한 여정.’ 얼마전 정부가 내걸고 있었던 광복 70주년 기념 표어다. 언론과 기관에서는 대한민국을 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고 칭송했다. 수많은 대기업 본사에는 광복을 기념하는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다.2015년 많은 사람들이 “선진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자축하고 있다. 하지만 불경기와 취업난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청년 세대 사이에서는 ‘헬조선’, ‘수저 계급론’과 같은 자조적인 용어들이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경향에 대해 일부에서는 자칫 심각한 사회적 병폐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현대판 계급제도 ‘수저 계급론’
최근 수저라는 용어가 청년 세대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 용어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서 등장인물인 핀자가 남편에게 ‘여보, 모두가 반짝인다고 해서 금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은수저로 태어나지도 않구요’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수저 계급론은 ‘부의 대물림’으로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나눠진다. 흔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로,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흙수저라고 부른다. 재벌을 상징하는 다이아 수저도 인터넷에서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각 개인이 어느 수저에 위치하는지 보여주는 수저 기준표가 유행하고 있다. 수저 기준표에는 연 가구 소득을 기점으로 금수저는 2억 원, 은수저는 8,000만 원 그리고 흙수저는 2,000만 원 미만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 학교 사회학과 이항우 교수는 “경쟁은 우리나라 사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단어”라며 “스펙 경쟁이 과열되다 보니 이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수저 계급표’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헬조선, 지옥 같은 우리나라
수저 계급론처럼 최근 들어 ‘헬조선’과 같은 자조적인 용어들이 청년 세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 여기서 헬조선은 헬(지옥)과 조선(우리나라)을 합성한 말로, 지옥 같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지옥불반도, 탈조선(한국으로부터 탈출함), 노오력 등 헬조선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앞서 청년 세대의 현실을 조명한 ‘삼포세대’와는 다른 해석을 지니고 있다. 삼포세대가 출산, 연애, 취업을 포기한다는 정도에 불과한 반면, 올해 등장한 용어들은 포기 외에도 자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항우 교수는 “헬조선과 같은 용어들은 청년 세대에서 사회 구조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며 “과거 학생 운동과 같은 집단적인 요구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 매우 흥미롭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청년 세대들이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 세대의 사회 불만이 갈수록 높아지다 보니 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이트들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현재까지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사이트가 10곳에 이른다. 대다수 게시판에는 ‘헬조선, 직장인들의 특징’, ‘우리가 탈조선을 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게시글이 올려져 있다.
우리 학교의 대표적인 어플리케이션인 ‘충북대 앱’에서도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대부분 취업에 대한 불만이 차지하고 있다. 충북대 앱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한 학생은 “최근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인터넷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며 “취업이 되지 않다 보니 익명으로 이뤄진 사이트에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자주 게재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의미를 가진 어플리케이션 게임이 등장하기도 했다. ‘길건너, 헬조선’이라는 이 게임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재난.사고들을 캐릭터가 피하는 형식이다. 한국이 지옥이라는 헬조선이라는 용어를 참고한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용어에는 기성세대에 대해 지금의 청년 세대가 가하는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충북대 앱’에 올려진 한 게시글에서는 “기성세대가 물려준 이 시스템에서 공부를 밤낮으로 해도 불투명한 미래 밖에 없다”며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 학교 인문대에 재학 중인 한 익명의 학생은 “많은 학생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정책을 결정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많다”며 “기성세대를 재테크에만 몰두한 ‘꿀 빠는 세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청년 세대들이 사용하는 신조어에 대해 일부에서는 ‘지나친 비관주의’라고 반박하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조선일보 오피니언에서는 ‘헬조선은 불평분자들 마음 속에나 있다’는 칼럼이 올라왔다. 숭실대 문예창작과 남정욱 겸임 교수가 쓴 이 칼럼에는 “청년 실업이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데 이 말에 100% 동의하기 어렵다”며 “헬조선이라는 말은 분수를 상실한 불평분자들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10월 26일 새누리당 최고 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도 “세계의 모든 개도국들이 우리나라의 성장과 발달을 부러워함에도 정작 나라 안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며 “미움과 분열이 우리나라를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와는 다른 학생들의 바람
지금의 청년 세대들이 과거 학생 운동과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인 목적 보다는 취업.학업에 관련된 각 개인의 문제에 집중됐다고 진단한다. 참여연대 안준영 운영위원은 “과거에는 민주화라는 목표에서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였지만 지금은 지향하는 방향이 개개인마다 다르다”며 “본인의 환경에 대한 불만과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 학교 학생 342명을 대상으로 현재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인지 물어본 결과, 취업준비 43.9%(150명), 학점관리 30.1%(105명), 경제적인 어려움 15.8%(54명), 고민이 없다 10.2%(35명) 순으로 집계됐다. 과반수 이상의 학생들이 취업과 학업으로 고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주영(청주시 상당구.23) 씨는 “상경계열이다 보니 취업에 대한 고민이 누구보다 크다”며 “주변에서도 자격증 공부와 복수 전공으로 취업의 문턱을 넘으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통계청이 지난달에 발표한 ‘10월 고용 동향’에서도 청년들의 취업에 대한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0월 고용 동향’ 자료에 따르면, 올해 취업 준비생은 63만 7,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4.7%나 증가했다. 우리 지역인 충청북도 실업률도 8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인 2.99%까지 상승했다. 청년 세대의 사회 불만이 갈수록 심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난 10월 29일 CBS 라디오와 인터뷰한 서울대 곽금주 교수는 수저 계급론은 2015년식의 시위문화라며 “80년대 이후부터는 시위 문화가 점점 없어져서 학생들이 사회에 자기네들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좀 더 개인화되고 이기주의화가 되어 가고 있는데, 가끔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여론몰이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금 현세대의 시위”라고 말했다.
실제로 충북대신문을 통해 ‘1996년-2015년 우리 학교 집회 및 학생운동 건수’를 조사한 결과, 1996-2000년 31건, 2001-2005년 13건, 2006-2010년 3건, 2011-2015년 3건으로 집계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학교 학생들의 집단 행동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2000년대 중반부터 집회 및 학생운동 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비운동권 총학생회를 뽑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80년대 대학생의 문화를 연구한 숙명여대 김미란 교수는 “1990년대 이후부터는 우리나라 대학 상황이 크게 변화했다”며 “과거 사회 비판적인 성향이 급속도로 퇴조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대학생들은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효율적인 방안만 쫓아가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주어진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모습이 청년 세대가 사용하는 신조어로 드러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청년 스스로의 사회적 참여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참여연대 강준원 운영위원은 “청년들이 정치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면서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많다”며 “정부도 청년들에게 꾸준히 정책을 토론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청년들 스스로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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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