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피바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그걸 직접 봤어” 진천 전투 당시 인근 마을에 살았던 신승철(진천군 이월면.86) 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주일간의 진천 전투를 ‘피바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1950년 7월 6일부터 12일까지 국군의 신분으로 진천 전투에 참전했다. 작렬하는 포화 속에서 수많은 국군 장병이 죽어갔다. 그리고 65년이 지난 지금도 수습되지 못한 국군의 유해가 봉화산-문안산 일대에 묻혀있다. 충북대신문에서는 이곳에 묻힌 영웅들의 대해 취재했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잣고개
진천의 잣고개는 봉화산과 문안산 사이에 있는 도로다. 차령산맥의 줄기인 봉화산과 문안산은 예로부터 청주와 진천의 경계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17번 국도 터널이 청주와 진천을 이어주고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잣고개가 차령산맥을 넘는 유일한 길이었다. 잣고개는 우리 학교 입구에서 711번 버스로 약 30분이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우회도로가 있기 때문에 잣고개를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다. 고갯길 정상에 위치한 주유소와 작은 휴게소를 빼고는 마땅한 건물도 없어 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고갯길 정상 아래쪽에는 1974년에 세워진 6.25 격전지탑이 세워져 있다. 당시 진천 중학교 학생과 교직원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탑이다. 격전지탑과 인접한 주변은 말끔한 정원으로 단정되어 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온통 야산이다. 외로이 서있는 탑만이 이곳이 한국전쟁의 격전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평생 진천에서 살았다는 택시 기사 김남건(진천군 진천읍.60) 씨는 “진천군에 사는 사람들도 잣고개에 6.25 격전지탑이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른다”며 “그러니 잣고개 일대가 한국 전쟁 때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타지 사람들은 더더욱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6.25 격전지탑을 방문한 시각이 오후 4시, 기자 외에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봉화산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도 낙엽으로 수북이 쌓여 있어 풀숲인지 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봉화산은 접근이 가능하지만 문안산 일대는 군사시설로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인근 지역에 사는 익명의 한 주민은 “이쪽 일대에 군부대 사격장, 공군 방공포대가 위치해 있다”며 “진천 전투 때 떨어진 불발탄도 많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힘든 곳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뺏고 빼앗긴 ‘고지전’
남침이후 천안 방면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다음 목표인 대전으로 향했다. 그러려면 차령산맥을 넘을 수 있는 진천을 거쳐 가야만 했다. 이를 파악한 국군은 대전으로 후퇴하던 수도 사단을 청주까지 전진 배치시키고, 주요 길목에는 방어진지를 설치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봉화산-문안산 사이에 위치한 잣고개였다.
이미 진천 잣고개에 국군의 방어 진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북한군은 봉화산과 문안산에 포를 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진천에서 살았던 김운기(청주시 상당구.79) 씨는 “백곡천 너머로 인민군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곡사포 사격을 하는 모습을 봤다”며 “인민군이 쏜 포탄이 그대로 봉화산과 문안산 방향으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격렬한 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이탈했고, 결국 봉화산과 문안산은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에 국군은 병력을 재정비하여 봉화산-문안산 수복 작전에 착수했다.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공방전은 계속됐고, 양측 모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운기 씨는 “어릴 때 호기심으로 친구들과 전투 현장을 간 적이 있었다”며 “계곡 사이에 국군과 인민군 시체가 산더미처럼 있는 것이 기억이 난다”고 당시 전투 현장을 전했다.
봉화산과 문안산을 두고 벌인 국군과 북한군의 공방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당시 전투에는 진천 중학교 학생 100여 명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실제로 육군본부가 발간한 <2005년도 6.25 전사자 유해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진천 사석리, 교성리, 문봉리 일대에서 수습된 유해에는 17~19세의 골격으로 추정되는 뼈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연령이 중학생까지 내려가는 치아가 발견되기도 했다.
잊혀진 봉화산의 영웅들
현재까지 진천 잣고개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와 관련된 자료가 사실상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의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도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당시 지휘관들이 임의대로 상부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것을 주민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민 증언이 절대적인 이유 중에는 진천 전투 이후에 동네 주민들이 시신들을 수습해 직접 묻었기 때문이다. <2005년도 6.25 전사자 유해발굴 보고서>에서 국군의 유해 위치를 증언한 양상윤(진천군 문봉리.81) 씨는 “그대로 방치된 시신이 악취가 심해 한꺼번에 모아 흙으로 덮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부친과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뒷편에 위치한 문안산에 유해를 매장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진천 잣고개 유해발굴에 참여한 우리 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 명예교수는 “남아 있는 자료가 신빙성이 떨어지다 보니 주민 증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나마 증언조차 틀리는 부분이 많아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유해발굴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형상으로 미뤄보아 급한 경사로 인해 유해들이 산 아래로 유실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계곡 아래에 집중적인 유해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봉화산과 문안산을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유해발굴을 하지 못한 문안산을 제외하고 봉화산 일대에서는 국군 전사자 64구를 포함해 총 68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올해 11월에도 유해발굴감식단은 37사단 장병을 투입해 유해 추정지역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봉화산-문안산 일대 조사는 매년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유해 발굴의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올해도 발굴 기간이 한 달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박선주 명예교수는 “유해발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예산과 인력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며 “정부와 시민 사회가 한국전쟁 유해 발굴을 긍정적으로 봤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선호 기자
preference@cbnu.ac.kr









신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