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고현장을 연일 보도하는 뉴스에서 익숙한 사람이 카메라에 잡혔다. 우리가 흔히 ‘차력쇼를 하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던 배우 정동남 씨였다. 의아한 마음에 찾아 본 그의 프로필에는 방송에 나와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던 시간 못지않게 긴 시간을 한국구조협회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번 세월호 사고뿐만 아니라 국내외 무수히 많은 사고현장에서 구조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한국구조협회 정동남 회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오랜 구조활동으로 인해 꽤나 지쳐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힘든 구조활동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나에게는 숙명 같은 일입니다”. 장황한 이유를 덧붙이지 않고 그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일을 ‘숙명’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가 살아온 굴곡 있는 인생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1971년, TBC방송국에서 탤런트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돈도 인맥도 없던 그에게는 좀처럼 이렇다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1일,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기회가 찾아왔다.
“1월 1일에 당시 <일요일 일요일밤에>라는 프로그램에서 저만의 차력쇼 특집을 기획했어요. 이전까지는 차력쇼를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남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저를 단번에 스타로 만든 것이죠” 그는 이후 CF 촬영 뿐만 아니라 흔히 돈이 된다고 말하는 밤무대에서도 활약하며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는 스타가 됐다.
당시 그는 연예계뿐만 아니라 구조 현장에서도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의 반열에 오른 연예인이 구조현장에 자주 나타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저의 구조활동을 사람들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구조현장을 방문하는 일종의 쇼맨십으로 보는 인식이 강했어요. 심지어는 인기를 좀 얻었으니 이제 국회 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죠”
그러나 그의 구조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과는 달리 사실 그가 구조활동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1969년도에 당시 중3이었던 동생이 물에 빠져서 익사했어요. 시신을 건져올려야 하는데 돈을 줘야만 시신을 건져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만한 돈이 없어서 며칠이 걸려서야 요구하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죠. 돈을 주니 그제서야 시신을 건져올리는 걸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물에서 희생되는 사람은 무조건 구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상구조활동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한국구조연합회를 설립해서 구조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수영을 주로 하던 한강 쪽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닥치는 대로 구조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1975년도에 구조연합회를 설립했죠”
현재 그가 이끌고 있는 한국구조연합회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민.관.군 구조활동의 공조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재난재해 발생 시에도 긴급구조 및 복구활동을 통해 국위선양을 한 바 있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한국구조연합회에는 4,700여 명의 대원이 있고 그중 3분의 1 정도는 위험지역에서 특수임무가 가능한 인원으로 구성돼 있어요. 이번 세월호 구조현장에서도 유속이 잠잠해져 구조가 가능한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투입시켰을 정도로 유능한 대원들이죠”
하지만 대원들의 열정만으로는 원활한 구조작업이 힘든 것이 현실이다.
“어느 구조현장을 가던지 구조작업을 하는 과정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해요. 위험을 감소시킬 만한 구조장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만한 장비가 없다는 게 문제예요”
그는 정부로부터의 지원도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한다. “2003년 12월에 기획재정부로부터 기부금 지원단체로 선정됐지만 구조장비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요. 구조에 들어가는 비용중 일부는 기부를 통해 확충하고 있는 현실이죠. 제가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벌어놓은 돈 대부분도 장비 구입 등 더 나은 구조환경을 위해 사용했지만 아직도 모자랍니다”
최적의 구조환경을 마련하기에 힘든 현실이라지만 그는 항상 묵묵히 대원들을 이끌고 사고현장을 방문한다.
“구조현장에서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계하면 슬픈 와중에도 참 고마워해요. 그런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제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구해낸 사람들 중에 구조원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구요. 이런 이유 때문도 있지만 그냥 여러분이 매일같이 학교를 나가 공부를 하듯이 저도 그냥 항상 나가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에 구조현장을 매번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지난 1993년 ‘서해 페리호 사건’ 당시 47구의 시신을 건져 올렸으며, 지금까지 총 580구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구조현장을 지휘하고 있으며 자신의 노하우가 충분히 현장에서 쓰이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고현장에서도 그랬듯이 민간 구조대원은 2선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현실 앞에 놓여있어 안타까움은 더해지고 있다.
“세월호 사고현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어요. 대통령에게 관.공 구조원들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민간구조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써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죠. 돈은 한푼도 받지 않을 테니 대원들 훈련할 수 있는 보조금만 지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구조에 대한 열정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타공인되고 있지만 어느덧 그의 나이는 60을 넘겼다. 그 자신도 구조현장에서 언제까지고 현역으로 구조를 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후임 대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에서 쉬고 싶죠. 하지만 막상 그만두고 쉬려고 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요.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노하우를 다 전달해 준 것인지 불안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냥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사고현장을 누비고 다닐 작정이에요. 정말 이 일은 제 천직이자 숙명인 것 같습니다”
콧바람으로 촛불을 끄고, 이빨로 캔맥주를 씹어먹는 기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는 이제야 그간의 선행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 소박한 영웅이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그의 행보가 국민 모두에게 귀감이 되길 기원한다.
박규빈 기자
wilshere@cbnu.ac.kr








박규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