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격동의 시기를 겪었던 우리 민족이지만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는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아픈 역사다. 그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은 자주적인 독립을 꿈꾼 우리나라의 자긍심이라 볼 수 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생존자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광복군은 이제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로 남아있다. 과거 충청북도에는 수십 명의 광복군 출신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갔지만 이제는 단 한 분만이 광복군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바로 충북 유일의 광복군 오상근 씨다.
1943년 10월 25일을 일왕의 연호인 소화(昭和) 18년으로 기억하는 그는 아직도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한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둔 누구보다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침 일찍 면사무소로 출근하려고 했어요. 마침 우편물을 확인하니 징병 통지서였죠. 그걸 본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을 등지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있다는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 기억이 생생해요”
진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였기에 고향과 이별한다는 생각에 수많은 걱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전시체제에서 애국이란 이름으로 놋그릇도 가져가는 시기에 징집을 거부한다는 것은 입 밖에도 꺼낼 수 없다. 결국 가족을 뒤로하고 그는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그의 나이 21살 때의 일이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다 보니 평양에 있는 제42부대에 도착해 있었어요. 그곳에는 저같이 끌려온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있었죠. 거기서 1개월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난 후, 중국 북지(만리장성 남쪽 지역)에 있는 한 부대에 배치돼 작전에 투입될 날만 기다렸어요”
1944년 4월, 그는 ‘대륙타동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계림(구이저우)을 향해 며칠을 걸었다. 그 속에서 민가를 약탈하는 일본군의 만행을 본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동하면서 일본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주민들의 식량을 약탈했어요. 지나가는 중국인을 붙잡아 괴롭히기도 했고 여성 같은 경우에는 겁탈하기도 했죠. 20대 청년이었던 저에게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중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뒤에서 따라오는 여성들이었다.
“부대가 이동하면 여성들이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들이 일본인인줄 알고 아무 말도 못 걸었죠”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고는 그는 매우 놀랐다고 한다. 지금 회상하면 그들이 ‘정신대’가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낮의 끔찍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밤에는 부대 내 일본군들이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할 때는 구타와 욕설을 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 그는 나라 없는 서러움이 폭발하면서 일왕을 위해 죽을 바에 차라리 조선인답게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3명의 조선인 동료들과 뜻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기로 했다. 목숨을 거는 일이지만 그들은 각오하고 탈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날도 며칠을 걷다 보니 전 부대원들이 녹초가 돼있었어요. 결국 부대장이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하더군요.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동료들과 같이 탈출을 시도했고, 일본군의 주둔지에서 벗어나 탈출에 성공했어요”
탈출에 성공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서 광복군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부푼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정부청사를 7차례나 옮긴 상황이었다. 그가 있던 계림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까지의 거리는 무려 300여 ㎞였다. 마땅한 교통편이 없을 뿐더러 맨몸으로 탈출한 상황에서 걸어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걷다가 쓰러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며칠을 걸어가니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임시정부는 둘째 치고 굶어 죽을 것 같다는 동료들의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아요. 동료 한 명이 손사래를 치며 도저히 못갈 것 같으니 나머지라도 임시정부를 찾아가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툰 중국어 탓에 중국인들이 ‘일본군 간첩’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결국 그와 동료들은 간첩죄라는 이름으로 중국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보내야 했다.
“낮에는 중국군이 활동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동하지 못했어요. 그 속에서도 우릴 도와준 중국인도 있었지만, 중국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보니 대다수 중국인들은 우리를 ‘일본군 간첩’으로 몰아가면서 결국 감옥에 수감시켰죠. 아무리 한국말로 조선 사람이라고 해명해도 그들은 우릴 믿지 못했어요. 서툰 중국어로는 그들을 이해시키기는 것이 불가능했죠. 이러다가 억울하게 감옥에서 살다 죽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때의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감옥에서 4개월 정도 있었을 때, 그에게 ‘일본군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
“하루는 중국 군인들이 우리를 책상에 앉혀놓고는 종이와 펜을 줬어요. 우리에게 일본군 포로를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라고 하더군요. 어쩌면 우리 결정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했고, 포로를 죽이는 것으로 결정했죠. 결국 우리가 포로를 죽이라고 손짓하는 것을 본 중국 군인들은 그때부터 오해를 풀기 시작했고 우리를 풀어줬죠”
그렇게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며칠을 걸어서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건물 앞에서 근무하는 경비병에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군요. 한참 기다리다 건물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나왔더군요. 그중 한 사람이 온화한 미소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어요. 처음에는 치파오(중국전통 의상)를 입고 있어 중국인 같았죠.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임원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악수를 청한 그는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그 후, 그는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돼 백범 김구 선생, 지청천, 이시영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임원을 보호하고 호송을 하는 역할을 했다.
“저는 임원들을 보호하고 호송하는 역할이었지만 당시 수많은 동료들은 미얀마와 중국 전선에서 첩보, 요원납치, 교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어요. 당시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지만 동료와 저는 조국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어요”
무엇보다 그는 광복군과 미국 전략정보국(OSS)이 계획한 ‘국내진공작전’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에 많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나라 잃은 슬픔은 말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가슴속에는 ‘한’이 맺혀 있었어요. 모두가 나이 구분 없이 조국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요”
광복군에 입대한 지 1년이 될 무렵, 그는 일본이 패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 라디오 연설을 들은 그는 동료들과 얼싸안고 광복의 기쁨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국내진공작전이 임박했을 때 미군들이 갑자기 작전을 중지하라고 했어요. 나중에 확인하니 미군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더군요. 조국이 광복된 기분은 매우 좋았지만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지금도 마음에 두고 있어요”
1946년 그와 동료들은 인천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와 터전을 잡았다. 그 이후 진천군청, 지역 내 중.고등학교에 근무를 비롯해 진천군 유도회지부장, 광복회 충북지부장을 역임했다.
정부도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63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의 가슴에는 수많은 훈장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가슴이 허전하다고 말한다.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동료와 광복군들이 더 이상 그의 곁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가 우리를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전우애를 키운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허전해요”
9년 전 그도 노환으로 인해 뇌출혈 수술을 받았다. 얼마 전에는 몸이 갑자기 나빠져 대학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은 잘 안보였지만 광복군으로 경험했던 일들이 점점 더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도 2층 건물 위에서 펄럭거린 태극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쓰여 있던 팻말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 글자 하나하나가 제 가슴속에 남아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기억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들이 독립에 힘쓴 그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조국, 광복이니 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해요.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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