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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호
세상의 모든 먹을 품다. 40년의 벼루 살이.
제 155 호    발행일 : 2015.04.06 
신명식 벼루장

세한도(歲寒圖)를 아는가? 바로 추사 김정희의 수묵 작품이다. 이 그림은 추운 겨울에 절개를 지키는 소나무의 모습을 잘 묘사해 국보 제180호로 지정됐다. 유배생활로 고초를 겪던 그가 ‘우당 이상적’의 인품을 기리기 위해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나무의 절개를 담기 위해 갈았던 벼루가 ‘보령 남포벼루’다. 예로부터 보령은 벼루장(벼루를 깎는 장인)이 많았다. 그 계보를 이어온 자가 바로 신명식(61) 씨다. 현재 그는 제18호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벼루 기능장이다. 그의 손을 거친 ‘자석(紫石) 원료’는 먹을 갈 때 끈적거리지 않고, 글을 쓰면 윤이 나 바래지지 않는 ‘단양 영춘자석벼루’로 탄생한다.


어깨너머로 배운 ‘벼루장의 길’

  예로부터 우리나라 선비들은 ‘문방사우’를 중시했다. 그중 문(文)은 선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다.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벼루’다. 당시 벼루는 글 쓰는 자에게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펜이 등장했고 점점 벼루는 시대 뒷전으로 밀려났다. 소백산 줄기가 충주호를 휘감는 단양, 디지털 시대인 지금도 ‘먹’을 새기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단양 영춘자석벼루를 만드는 신명식 씨다.
  “빨리 깎지도 말고 느리게 깎아서도 안돼. 그 순간 ‘몰입’하는 정신으로 다듬어내야 진정한 벼루가 탄생하지.” 그는 제18호 충북무형문화재 ‘벼루 기능장’이다. 그와 벼루와의 인연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논 것이 돌이야. 공터 바깥에 원석을 쌓고 벼루 만드는 것을 항상 어깨너머로 보았지.” 그는 예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벼루장의 집안에서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보령에서 벼루 만들기로 이름 날렸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할아버지가 만든 벼루를 보고 조선 최고의 벼루라고 치켜세웠다. 그런 모습을 본 그의 아버지도 결국 벼루장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의 손은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원석을 수백 번 들었다 놨다 할 때 찔린 상처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나에게 벼루를 배워보라는 말은 한 번도 안 했는데, 그때 나는 ‘벼루 만드는 솜씨가 없구나’라는 생각만 한 것 같아.”
  벼루와는 인연이 없었다고 생각한 그는 한동안 우체국 유선전신기사로 일했다. “반복된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싫증이 나더라구. 결국 몇 달만 일하고 그만뒀어.”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길을 걷던 그에게 널부러져있는 돌이 눈에 들어왔다. 단단하지만 깨지지 않는 돌, ‘오(烏)석’이었다. “보령은 예로부터 오석이 많았는데 검은색으로 칠해진 것이 마치 까마귀 같아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거야. 쓸모없는 돌을 최고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벼루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길을 걷고 싶다는 걸 느꼈지.”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벼루에 대해 모든 것을 배워나갔다. 그의 나이 21살, 벼루와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단양에서 만난 자석(紫石)과의 인연 

  그가 충청북도 단양에 자리 잡은 계기는 아버지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그의 아버지도 징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단양이었다.
  “일본사람들이 보령의 벼루장들을 강제로 끌고 갔어. 그 속에 내 아버지도 있었지. 하루 12시간씩 광산에서 일하고 벼루를 만드는 일을 시켰다고 말해주더군.” 그때 그의 아버지가 본 것은 붉은 빛을 내뿜는 원석이었다. 그 돌로 벼루를 만들어보니 먹이 감기지도 않고 바래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선팔도에 그런 원석은 처음 봤다고 했어. 그리고 나에게 그 원석으로 최고의 벼루를 만들 수 있다고 자주 말해줬지. 원석을 다시 찾기 위해 나는 단양 전체를 쥐 잡듯이 찾아다녔어.”
  몇 년 동안 그는 보령에서 단양까지 여러 번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찾아다녔다. 그렇게 마을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찾아다닌 결과, 1972년에 그는 붉은색을 내뿜는 원석을 찾아냈다. “아무리 사전을 찾아봐도 이 돌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어. 마을 원로들도 붉은 돌이라고만 말하더군. 그때 나는 붉을 ‘자’를 따서 ‘자(紫)석’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그는 마을 장정들과 힘을 합쳐 그 원석을 작업장으로 옮겼다. 원석을 네모반듯한 벼루로 만들어 먹을 갈아내니 색은 바래지지 않고 은은한 빛을 냈다. “다른 돌로도 벼루를 만들었지만 자석만큼 좋은 원석은 없었어. 그때부터 ‘영춘자석벼루’를 만들기 시작했지.” 그에게 단양은 이제 제2의 고향이다. 자석과 같은 진귀한 원석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단양의 매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태어난 곳은 보령이지만 이곳에서 43년 동안 벼루를 만들었으니 나에게 단양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지. 나에게 자석과 단양은 뗄 수 없는 관계야.”

외국인도 알아본 ‘영춘자석벼루’

  30년 전은 벼루산업의 호황기였다. 그때의 호황기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하루에도 전국에서 주문전화가 수십 통이 빗발쳤어. 아무래도 그때는 서예가 많다 보니 벼루에 대한 수요도 많았지. 심지어 외국에서도 내 벼루를 찾았지.” 당시 일본인들은 단양까지 찾아와 ‘영춘자석벼루’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벼루제작이 발달한 일본에서도 그의 벼루를 찾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의 벼루를 ‘신 단계연’이라고 불렀다. 단계연은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벼루로서, 당나라 시대부터 중국 사람들이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원석을 다듬고 깎는 모습을 보고는 대단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지.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해도 아깝지 않은 벼루라고 말하곤 했어.” 하루에도 사람들이 벼루를 수천만 원씩 사갔다는 그의 말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원하는 문양에 맞게 벼루를 제작해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한반도, 비둘기, 무궁화 모양을 형상한 벼루를 부탁했다. “여태까지 그런 모양으로 부탁한 사람은 없었어.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말하더라구. 몇 주 동안 그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아.” 그 작품의 주인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들도 그의 벼루를 찾았다. “많은 유명인들도 내 벼루를 찾았어. 막중한 책임도 들었지만 그런 부탁을 받았을 때 우리나라 최고의 벼루장이라는 자부심을 많이 느꼈지.”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포함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벼루를 제작했다.
  “지금은 나와 아들만 작업장을 지키고 있지만 그때는 20여 명의 기술자들이 작업장에서 함께 일했지.” 벼루장이라는 책임과 그리고 ‘영춘자석벼루’를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말할 때 그의 눈을 누구보다 또렷했다.

사양화된 ‘벼루산업’, 외로운 장인 

  무역개방화로 중국산 벼루가 쏟아져 나오자. 점차 사람들은 값싼 중국산만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벼루제작 기술도 따라잡혔다. 국산 벼루가 뒷전으로 밀려났고 전국의 벼루장은 한두 명씩 사라졌다. 벼루의 몰락에 그의 영춘자석벼루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90년대 초부터 값싼 중국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 점점 기술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보니 사람들은 중국산만 찾았지. 지금은 벼루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어.”
매일같이 오던 외국인들도 이제 찾아오지 않는다. 작업장은 그와 그의 아들만이 지키고 있다. 오늘날 그를 포함해 전국에서 벼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날 것 같아. 만일 내가 벼루장을 그만두면 대신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힘들어도 벼루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도 아들이 명맥을 지켜준다니 다행이야.”
  현재 그의 아들도 벼루장이다. 처음 벼루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에게 그는 반대했다.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반대했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도 아니고 고생만 한다는 걸 누구보다 알기에 더욱 말렸지.” 그러나 벼루제작을 지켜보는 아들의 모습을 본 그는 어릴 적 본인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내 아들은 벼루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해 보였어. 예전에 내 모습이 기억이 났지. 그때부터 벼루를 가르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에게 아들은 이제 어엿한 동료다. 평생 혼자만 갔으면 외로웠을 벼루장의 길을 아들이 같이 가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불안감은 여전하다. 아들 말고는 벼루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소망은 인간문화재 등록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벼루장이 국가지정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경우가 없다고 하더라구. 이제 나이가 들어 재료를 옮기는 것도 힘들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국가지정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야. 나라에서 인정해준다면 그때부터 사람들도 벼루를 배우러 올 것 같기 때문이지.” 그의 작업장에는 손때가 안 묻은 도구가 없다. 벼루를 ‘자신의 업(業)’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누구보다 벼루를 사랑하고 있는 벼루장임을 알 수 있었다.
 

김선호 기자
preference@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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