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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호
65년 만의 만남, “영감은 잘 계셨소?”
제 899 호    발행일 : 2015.11.02 
이순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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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에는 흥남철수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덕수 가족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덕수가 피난선에 올라타려던 여동생 막순이의 손을 놓치는 순간, 덕수 아버지는 막순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뛰어든다. 결국 피난선에 오르지 못한 덕수 아버지와 막순이는 덕수와 생이별을 하고 만다.
이처럼 안타까운 생이별이 그저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픽션이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덕수 가족처럼 한국전쟁으로 생이별한 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이산가족이 12만 명이나 된다. 지금까지 이산가족 상봉자는 15%에 불과한 실정이다. 올해는 200명의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는데, 청주 토박이인 이순규 할머니도 그중 한명이다. 65년 전 백년가약을 맺고 한평생 남편을 기다려온 이순규 할머니의 사연을 들어봤다.



이순규 할머니, 인연을 만나다

  이순규 할머니는 1931년도에 청주군 강내면 사인2구(현 강내면 월탄 3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혼란한 세상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밤마다 순사들이 돌아다니고 감시하던 시절이라 정말 무서웠지. 집에 들어와서는 총을 만든다고 집안에 있는 웬만한 놋그릇은 다 가져가 버리더라구. 지금 생각해봐도 내 젊은 시절은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
  옛 생각에 잠긴 이순규 할머니는 한동안 “힘든 시기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감시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에 힘들고 지쳤지만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꽃다운 19살인 이순규 할머니에게 단짝같은 남자가 있었다. 지금은 북한에 살고 있는 오인세 할아버지다.
  이순규 할머니와 오인세 할아버지의 인연은 친정아버지의 소개로 시작된다. 그때 오인세 할아버지는 강내면과 가까운 가덕면에 살았다.
  “나는 강내면에서 친정식구들과 살았고, 영감은 가덕리에서 살았지. 가까우니 밤에도 영감이 강내면으로 자주 왔지”
  이순규 할머니가 기억하는 70년 전의 오인세 할아버지는 가덕면에서 가장 잘생기고 똑똑한 청년이었다.
  “내 기억 속에 영감은 매우 똑똑했다우. 일도 똑부러지게 한 걸로 기억이 나지. 주변에서도 그렇게 여자에게 잘해주는 남자도 없었던 거 같아”
  무엇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오인세 할아버지의 모습에 반한 이순규 할머니는 결혼을 약속했다. 1949년 12월 9일은 이순규 할머니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때는 요즘 시대보다 결혼식을 크게 한 것 같아.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돼지도 잡고 그랬지. 영감은 사모관대를, 나는 족두리를 쓴 채로 백년가약을 맺었지”
  그때 이순규 할머니의 나이는 19살, 오인세 할아버지는 18살이었다.
 
19살의 새색시, 이별을 맞이하다


  여느 신혼부부처럼 오인세, 이순규 부부도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짧게 마무리됐다. 이순규 할머니는 한국전쟁을 매우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가 엄청 더웠던 걸로 기억하우. 한창 여름 모내기를 할 때쯤이라 마을에서는 한창 바쁠 시기지. 처음에는 인민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몰랐지”
  당시 일반인들은 농번기로 바쁜 사이 우리나라는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의정부, 서울, 수원이 하나둘씩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대전과 청주로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이순규 할머니도 조금씩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것을 마을사람들에게 들었지. 그 소식에 걱정이 들더라구. 당시 삼촌이 육군 헌병 대위였거든. 인민군이 내려올 때마다 국군.경찰 출신 가족들은 다 잡아간다고 들었기 때문이지”
  불안한 마음에 이순규 할머니는 피난을 결정했다. 남편과 함께 세간들을 간단히 챙기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전까지 걸어갔다.
  “대전을 와보니 곳곳에서 연기가 나더라구. 포성도 들을 수 있었지. 이미 인민군들이 대전을 점령했다고 하더라구”
  어쩔 수 없이 이순규 할머니는 강내면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군인 집안이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 이순규 할머니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마을에 있는 장정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들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10일간 훈련을 받는다고 했어. 한 남자가 오더니 ‘남편이 10일간 훈련을 받는다’면서 그 후에 남편을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솔직히 인민군인지 국군인지도 몰랐어. 그때는 아는 것이 없으니 언젠가는 돌아오겠구나 싶었지”
  하지만 남편은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생각에 이순규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영감이 바보는 아니라서 반드시 집에 찾아올 거라고 믿었지. 못 찾을 양반이 아닌데”
  한동안 조용하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사자 통지서도 날라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혀. 그러면 차라리 제사라도 치룰 수 있을 테니까. 인민군이 끌고간 것도 이산가족 상봉 때야 알았어. 어린 나이에 너무 슬펐던 거 같아”
  그때 그의 뱃속에서는 아들이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 헤어지고 난 후, 이순규 할머니는 홀로 60여 년간 아들을 키웠다.


악착같이 살았던 지난 날의 삶
  
  오인세 할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이순규 할머니는 악착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 대구, 서울 등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삵바느질을 해왔으니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것 같아”
  이순규 할머니는 아들을 엄하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미안함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근본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보니 아들에게 자주 회초리를 들었지. 혹시라도 버릇없는 이유가 아버지 때문일까 봐, 지금으로선 미안함이 드는 부분이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 같았던 남편에 대한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찌나 그리웠는지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니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더라구”
  1978년부터는 아예 남편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 제사는 37년간 이어졌다.
  “예전에는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이 있어서 몇 번이나 찾아다녔지. 그런데도 남편 흔적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어. 결국 가족들도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지”
  이순규 할머니가 남편의 생존사실을 확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이다. 심지어 오인세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이튿날에 생존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아들이 이순규 할머니 몰래 대한적십자사로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나, 아들 그리고 며느리까지 믿지 않았지. 누군가 사기를 치는 줄 알았어. 처음에는 가슴 떨리더라구”
  올해 이순규 할머니는 제19차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올랐다. 12만여 명 이산가족 신청자 중에서 200명 안에 든 것이다. 특히 부부상봉자로서는 더욱 드문 경우다. 실제로 대한적십자사 김성주 총재는 “이순규 할머님은 정말 평생 운을 다 쓰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영감 이제는 벌금을 내야 하지 않겠소?”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날은 어떠셨어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순규 할머니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전했다. 설렘과 그리고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말 한숨도 못 잔 거 같아. 65년 만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꿈 같았다우. 밤새 눈을 감아도 잠자리만 뒤척인 것 같아”
  이번 이산가족 상봉 때 이순규 할머니가 오인세 할아버지에게 건넨 선물은 65년 전의 두 사람의 약속이었다. 그가 시집 갈 때 만해도 집에 벽시계가 없었다. 그때 남편은 “올해 가을추수가 끝날 때쯤에 벽시계를 사자”고 약속했다. 65년이 지나서야 부부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65년 전의 약속을 위해 이순규 할머니는 남편에게 작은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던 과거를 추억하는 바람이었어. 이렇게라도 남편을 만났으니 어찌나 좋은지 몰라. 정말 아들하고 쏙 빼닮은 것 같아”
  상봉과정에서 이순규 할머니는 오인세 할아버지에게 “영감, 아들을 이만큼 키웠으니 벌금을 내야 하지 않겠소”라는 농담도 건넸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
  “북쪽의 감시원들도 많았을 뿐더러 상봉시간 자체도 너무 짧았어. 65년의 세월을 어떻게 2박 3일안에 말할 수 있었겠어”
  무엇보다 이순규 할머니는 기자에게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통일보다는 평화가 좋아. 왠지 통일은 마음이 조마조마해, 앞으로 평화라도 찾아와서 남북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지”
  실제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이후, 남북한을 포함한 약 660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다. 하지만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기억되지 않은 역사로 남겨지고 있다.
  이순규 할머니는 자신의 사연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산가족의 현실이 옅어지기 전에 자신의 삶을 다뤄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남편과의 헤어짐, 홀로 키워온 아들, 이산가족의 현실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요즘에 내가 나오는 신문을 모아두고 있지. 이외에도 사진, 물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다우. 나중에 책으로 쓸 생각이야. 앞으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지하에서 봐요’라는 영감의 말이 왜 이렇게 씁쓸한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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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기자
preference@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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