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 쉬는 그릇’을 들어봤는가. 바로 과거 선조들이 곡식과 음료, 조미료 등을 보관할 때 사용했던 용기인 ‘옹기’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알고 있는 장독대나 항아리, 시루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보관 뿐만 아니라 김치, 젓갈, 된장, 간장 등 발효 식품들도 옹기에 담아 발효시켰다. 하지만 현대에는 거주형태가 아파트 혹은 주택으로 변화하고 옹기를 설치하는 데 제한이 많아졌다. 게다가 옹기보다는 플라스틱 혹은 스테인리스 등 금속 용기의 사용이 많아졌다. 그 결과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던 옹기의 쓰임은 줄어들고, 전통방식 그대로 옹기를 제작하거나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현저히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려 200여 년 전통의 옹기 제작 방식을 전수받아 보존하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충북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박재환 옹의 셋째 아들 박성일 전수자다.
현대사회에서 위협받는 옹기
만나기로 한 오후 2시 기자가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봉산리 입구에서 기다리면 차로 태우러 오겠다는 박성일 씨의 전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성일 씨가 도착해 기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들반들한 옹기의 표면을 닮아 부드러운 인상의 그였다. 그가 옹기를 제작하는 작업장인 가마터에 도착하자 다양한 옹기들이 보였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반들반들한 것부터 투박한 모양까지 수없이 다양한 장독대와 항아리 등이 있었다.
그런데 벽에 ‘옹기의 200년 역사를 보존하라’는 현수막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이를 바라보며 그는 충청북도에서 경제적 관점으로 옹기 가마터 부지를 바라보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지금 충청북도에서 이 가마 부지에 오송생명과학단지 개발지구가 들어설 계획 때문에 가마터를 없애고 건물을 지으려 해요. 외국은 전통과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더 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전통과 문화재보다 돈이 되는 사업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정말 아쉬워요. 현재 별로 남아있지도 않은 전통 가마터를 당장의 이익 때문에 없앤다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 분명하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민단체, 그리고 전통문화보존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충청북도에 계속 반대 의견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잠시 아쉬움을 뒤로하고 가마터의 안을 소개했다. 원룸 두 개 규모의 가마터 안에는 옹기를 굽는 가마, 아직 유약을 칠하지 않은 옹기, 완성된 옹기 등이 있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이어 그는 옹기를 만들 때 입는 하얀 옷을 입고 가마 앞에 앉아 자세를 취했다.
“겨울철에는 온도 때문에 옹기를 제작할 수 없어 만들 때 자세와 모습만 보여드릴게요. 함께 옹기 만드는 체험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영업사원을 꿈꾸던 그
자리를 옮겨 가마터 가까이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동안 그가 살아온 길을 따뜻한 녹차와 함께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1963년 경기도 안성시에서 오 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재환 옹은 1830년대부터 이어져 온 1대 전통 옹기 제작의 역사를 잇는 7대 옹기 전수자였다. 실제로 박재환 옹은 2003년에 충북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선정됐다.
“옹기장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옹기를 접하게 됐죠. 옹기를 만드는 가마도 친근해지고 주변의 옹기를 구경하면서 만들어지는 과정도 흥미롭게 지켜봤죠”
하지만 그가 어렸을 때부터 옹기장을 꿈꾸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 시절 경험한 옹기 제작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또한 옹기는 모두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온종일 옹기 곁에서 지냈던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와 같은 용기들이 발달하면서 청소년기에 옹기의 중요성도 크게 깨우치지 못했다. 옹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에 나가 회사 영업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실제로 그는 대학교에서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제약회사 영업부에 들어갔다.
“제약회사 영업부에 들어가서 일부러 제주도에 지원했어요. 옹기 만드는 것을 피하고자 지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옹기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을 만나 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회사생활을 제주도에서 3년 동안 했었죠”
하지만 옹기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가마터를 찾아가 아버지께 옹기 제작을 조금씩이라도 배웠다. 그 후로 그는 제약회사에서 20년을 일했다.
원하던 사회생활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옹기를 제작하는 옹기장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 전통 옹기의 맥이 끊길 수도 있고 전통문화를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죠. 아버지께서도 7대 옹기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200년의 전통을 잇고 계셨거든요”
그는 제약회사 생활을 끝내고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았다.
옹기장으로서의 그, 천주교와 옹기
가업을 물려받고 그는 조금씩 배워오던 옹기 제작 방법을 떠올리며 노력했다. 날마다 기술을 전수받고 공부하며 옹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는 옹기를 옛날 어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옛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아는 온고지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시대가 바뀐 만큼 옹기를 현대에 적용하려 노력했어요. 기존의 옹기도 유지하면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나갔죠.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이윤이 남을지도 생각했어요. 그래서 입소문을 듣고 온 손님이나 단골에 한정됐던 판매범위를 인터넷과 전화판매 등으로 넓혀 많은 소비자가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죠”
조리용 뚝배기나 음식을 숙성하는 항아리, 꽃을 담아두는 화병까지 머릿속으로 현대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구상해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그는 옹기장으로서 가져야 할 가치와 덕목을 되새겼다.
“옹기장은 가난하게 살지라도 전통을 잇는다는 맥을 항상 명심해야 해요. 또한 기술력을 갖춘 숙련된 장인이 돼야겠죠. 그리고 본인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죠”
다음으로 현대에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인 천주교와 옹기의 동행에 관해 설명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1대 옹기장께서 옹기를 제작할 때에는 1830년대 천주교 박해가 이뤄졌던 시기였어요. 그분들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충북 진천이나 충남, 경기도 등 산간지역에 들어가 옹기를 만드는 천주교 교우촌을 형성했죠. 그 후 옹기의 아래에 몰래 십자가를 표기해 신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새기기도 했어요. 실제로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옹기를 소중히 여겨 ‘옹기 장학재단’을 설립했어요. 현재에도 진천에는 교우촌이 있던 베티 성지가 존재해요. 하지만 옹기를 계속 생산하고 있는 교우촌은 여기 오송읍 봉산리 마을이 유일해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천주교와 옹기는 함께 계승되고 발전해온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생기면 곧장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옹기와 그에게 배우는 삶
그는 옹기에서 어떤 것을 느낄까. 그는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 후 입을 열었다.
“우선 옹기와 사람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우선 옹기도 숨을 쉰다는 점이죠. 점토가 구워지면서 미세한 구멍이 생기는데 물구멍보단 작고, 공기보단 크죠. 그래서 공장에서 생산되는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용기와는 달리 숨을 쉬어요. 그리고 옹기의 제작과정은 사람이 아기로 태어나 학교에 가고 사춘기를 겪은 후 성인이 되는 과정과도 닮았죠. 옹기도 잠깐 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죽한 점토가 5일 정도 푹 구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유약을 발라 코팅까지 해야 하거든요”
이어 그는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요즘은 제가 대학 다녔던 80년대와는 너무 다르죠.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취업준비보다는 정부에 맞선 운동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현재는 취업준비가 더욱 중요해졌죠. 어떤 사람들은 대학생에게 ‘놀고 즐겨라’와 같은 말을 자주 해요. 물론 대학생활을 재밌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실력으로 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공도 살리기 힘든 현실에서 미래를 철저히 준비해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거든요”
또한 대학생으로서 인성과 다양한 활동을 강조했다.
“저도 옹기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사와 인성 교육 자격증을 취득해서 옹기체험을 진행하고 있어요. 옹기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놓칠 수 있는 인성을 교육하는 것이죠. 젊을 때 형성된 인성이 어른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행복과 낭만,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찾아가야하는 것 같아요. 가끔 청주 혹은 서울로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돼요. 학생들도 평소 하던 것 이외에 매우 다양한 활동을 찾아 체험해서 직접 느낀다면 큰 발전이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가끔 젊은 대학생들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소통한다고 한다. 그는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참신한 아이디어와 많은 영감을 얻는다. 이날 비록 계절 때문에 가마의 열기와 옹기를 느끼고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기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의 따뜻한 마음씨만큼은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손관수 기자
hand@cbnu.ac.kr








손관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