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지난달 21일에 개봉한 후, 포털사이트 영화 평점 역대 1위에 오르며 연일 많은 이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은 지난 2007년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 공개 청문회다. 이 자리에 참석한 故 김군자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은 여전히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안이정선 대표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중이다. 윤리적 소비 브랜드 ‘희움’으로 더 잘 알려진 시민모임의 안이정선 대표를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회운동으로 치열한 삶을 살다
그녀가 대표로 있는 시민모임은 대구.경북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힘쓰는 한편, 대구.경북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복지 지원활동 또한 전개하고 있다.
“우리 시민모임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에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여생이라도 편안히 지내다 가실 수 있도록 하는 복지 지원활동과,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역할이 그것이죠. 개인은 약하지만 그 개인이 모여 단체를 이루면 힘이 세잖아요”
지난 1997년에 출범한 시민모임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안이정선 대표는 창립회원으로, 20년 간 시민모임에서 활동해왔다. 대구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녀는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을까.
“대구로 온 것은 단지 남편의 직장 때문이었어요. 그때가 1988년인데, 여러 사회 문제가 수면 위로 막 떠오를 때였어요. 6월 민주항쟁의 여파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알려지게 됐죠”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안이정선 대표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처음 시작했던 것은 학부모 모임이었어요. 1988년 대구에 온 직후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선생님께 드리는 촌지가 있는 거예요. 내가 학부형이 된 지금까지도 촌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또래의 엄마들과 함께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모임’을 시작하게 됐고, 이러한 경로로 자연스럽게 대구여성회와도 연결이 됐어요”
안이정선 대표는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때에 대학 시절을 보냈다. 소위 말해 ‘운동권’이었다는 그녀는 대구여성회의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구여성회 사무실에 처음 가서 보니 입구에 과격한 판화가 걸려있었어요. 저는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어서 ‘대구에도 이런 게 있네’ 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주체적인 여성, 평등한 사회’라는 대구여성회의 모토가 마음에 들어 가입하게 됐죠”
이후 안이정선 대표는 10년간 대구여성회 회장을 맡으며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받는 여러 가지 차별과 불이익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안이정선’이라는 4자의 이름도 1990년대 중반, 전국의 여성단체들과 함께 호주제 폐지운동을 전개하며 바꾼 이름이다.
“당시에 호주제 폐지운동 차원에서 부모 성 같이 쓰기를 했어요. ‘안’은 어머니 성이고, ‘이’는 아버지 성이에요. ‘이안정선’보다는 ‘안이정선’이 발음하기 쉽더라고요. 이름이라는 것은 남에게서 많이 불리는 것이니까 발음하기 쉬운 ‘안이정선’으로 쓰기 시작했죠”
‘위안부’ 문제와의 인연
안이정선 대표가 ‘위안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대로 들어선 후다.
“1990년에 이화여대 윤정옥 명예교수가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기사를 연재했어요.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던 흔적을 찾아 남태평양과 사할린 등을 현지 조사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죠. 저 또한 위안부 문제는 정말 심각한 여성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이 시기, 대구여성회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구 지역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해 피해자 신고 접수를 받고, 정부에 피해자로 신고한 할머니들을 모시고 증언 활동을 하는 정도였어요. 그러다 1995년에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대구여성회 안에 한 부서를 만들었죠”
그러던 1997년,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는 더욱 전문적인 활동을 펼치기 위해 대구여성회에서 독립해 시민모임을 발족했다.
“대구에 오기 직전에 4년간 일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어요. 일본어가 가능한 점이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에도 도움이 됐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희망을 모아 꽃피움, ‘희움’
의식팔찌로 잘 알려진 브랜드 ‘희움’은 알고 보면 시민모임의 자체 브랜드다. 시민단체가 후원금에만 의존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는 사업을 직접 운영해 경제적으로 자립한 사례가 드물어 주목할 만하다.
“희움은 ‘희망을 모아 꽃피움’이라는 문구의 앞과 끝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에요. 할머니들의 못다 핀 희망을 꽃피운다는 의미죠. 희움에서는 피해자 정서치료의 일환인 압화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요”
희움의 다양한 상품은 대부분 故 김순악 할머니, 故 심달연 할머니가 남긴 압화 작품에 기반을 두고 있다. 초기에는 할머니들의 정서 치료의 일환으로 압화 작품 만들기를 시작했다.
“시민모임 활동을 함께 해 오신 원예치료사 두 분이 각각 할머니 댁을 방문해서 심리치료프로그램으로 원예수업을 진행했죠. 나중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이파리와 꽃잎을 말리는 준비 작업 또한 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진 것은 물론이고, 미적 감각도 작품 속에 드러나 완성된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어 판매도 하고, 다른 전시회에 출품도 했죠”
그러던 중, 두 할머니가 지난 2010년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압화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할매, 사랑에 빠지다’라는 이름으로 작품집을 두 차례 발간했다.
“이 작품집을 보고 고려대 경영학과 동아리 ‘인액터스’에서 할머니들 작품을 디자인해 상품을 만들어 판매해보자는 제안을 해왔어요.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게 희움이죠. 지금은 시민모임 내부에 희움 사업팀을 두고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Blooming their hopes with you’ 문구가 적힌 의식팔찌는 희움의 꾸준한 인기상품이다. 의식팔찌가 처음 출시된 이래, 수십만 개가 팔려나갔다.
“의식팔찌에는 압화 작품이 들어가 있지 않지만, 2,000원의 저렴한 가격이라 많은 분들이 구매해주시는 것 같아요. 학생들은 학급단위, 학년단위로 공동구매를 하기도 하고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구매해 주세요. 의미를 이해하고 동참해 주시는 희우머(희움 상품 구매자를 부르는 애칭)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죠”
“평화와 인권의 장을 꿈꿔요”
지난 2015년, 시민모임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하 희움역사관)을 개관했다. 역사관 건립은 시민모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의 수는 나날이 줄고 있어요. 할머니들께서 다 돌아가시면 ‘위안부’ 문제 해결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이는 후대가 계속 안고가야 하는 문제니까, 후세에 전할 교육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에 지난 2009년에 ‘일본군위안부자료교육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지만, 후원금으로 운영되던 시민모임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자체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대구 한복판에 나가 캠페인도 진행하고, 희움 상품을 가져다 팔기도 했죠”
이러한 노력으로 뒤늦게 여성가족부와 지자체에서도 지원에 합류했고, 마침내 역사관 개관의 큰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에 위치한 희움역사관은 192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있다.
“마침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을 구입한 건 아주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로 스토리 텔링이 되니까요. 건물 뒷마당에 라일락 나무가 있는데 이 건물을 처음 지었을 때 심어진 것으로 추정돼요. 할머니들이 살아오신 시기와 어느정도 비슷한데 그래서인지 라일락꽃이 만개할 때는 왠지 마음이 짠하죠”
안이정선 대표는 희움역사관이 향후 나아가 평화와 인권의 장이 되길 꿈꾸고 있다.
“저희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평화와 인권이에요. ‘위안부’ 문제 자체도 보면, 전쟁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이 완전히 짓밟힌 것이잖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기에 우리 희움역사관이 인권교육의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다 돌아가신다고 해도 희움역사관이 할 일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지영 기자
jy905@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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