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은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과 폭정에 항거해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적 순간이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우리나라 국민과 전 세계에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하면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 두 남자가 든 커다란 태극기와 함께 상의를 벗고 만세를 부르며 달리는 시민의 모습을 찍은 고명진 사진기자가 바로 그이다.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하다
그의 기자에 대한 꿈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쓴 시가 교지에 실리면서 그는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됐다.
“제 기자의 길은 중학교 때 시작된 것 같아요. 교지에 시를 하나 쓰게 됐는데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 후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됐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신문반에 들어갔어요. 신문반 활동을 하면서 제가 찍은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렸는데 저한테는 아주 인상적이었죠. 그 일을 계기로 사진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이때부터 그는 사진과 함께 관련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싣는 것을 즐기게 됐다.
“비록 고등학교 신문이었지만 제가 찍은 사진과 쓴 기사로 신문을 채우는 게 재미있고 신났어요. 그렇게 일을 즐기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이 돼 ▲신문반 ▲영자신문반 ▲사진반 ▲방송반을 모두 총괄하는 보도부장을 맡게 됐어요. 그때 ‘나는 기자를 해야겠구나’라는 결심을 했어요. 그중에서도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사진 찍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전문대에 진학했어요”
좀 더 빨리 기자가 되고 싶어 선택한 전문대였지만, 그는 학력 때문에 원하던 일간지 사진기자가 될 수 없었다.
“저는 빨리 학교를 마치고 기자가 되고 싶어 전문대를 선택했어요. 하지만 졸업하고 보니 학력 때문에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메이저 신문사의 사진기자로 들어가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주간지 사진기자로 첫 경력을 시작했어요. 주간지 일을 하면서도 ‘꼭 일간지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죠. 그러다가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을 거쳐, 1980년 12월 <한국일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일했어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다
사진기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1987년 6월에 찾아왔다.
“1987년 6월 10일 서울에서 ‘6.10 국민 대회’라는 대규모 민주화 요구 집회가 있었어요. 이전에는 학생들만 민주화 운동을 펼쳤는데, 이때는 시민들도 참여했죠. 한 마디로 화이트칼라가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것이에요.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함성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죠. 이때 박종철 열사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6월 26일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평화의 타종’ 행사를 개최한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이에 맞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모여들고 있었죠. 저도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6월 24일 대구에서 민주화 집회를 취재하다가 사복 경찰인 백골단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어요. 저는 실신을 했고 병원에 입원까지 했죠. 하지만 부산 집회를 꼭 취재하고 싶었어요.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다시피 부산으로 향했죠”
몸을 돌보지 않고 취재를 위해 부산에 도착한 그는 타종식이 이뤄질 사찰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사찰로 향하는 길목은 경찰들에 의해 봉쇄돼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군중이 밀집한 서면 로터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에 담게 된다.
“저는 시위대의 행진 모습을 찍겠다는 생각으로 서면 로터리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곧 경찰들이 최루탄을 쐈고 매운 가스가 퍼지는 와중에 어디선가 큰 태극기가 등장했어요. 그리고 태극기와 함께 상의를 벗은 한 시민이 만세를 부르며 뛰어나왔죠. 그때 딱 ‘이건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러 네 컷을 찍었어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제대로 순간을 포착한 건 딱 한 컷이더군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정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1987년 6월의 민주화 열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진을 얻었지만 정작 신문에는 싣지 못했다. 그의 사진이 세상에 빛을 보고 제대로 평가받는 일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능해졌다.
“사진을 신문사에 송고했지만 다음 날 신문에서 제가 찍은 사진은 찾을 수 없었어요. 편집국장에게 따지니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라 보도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 신문들은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화염병과 각목이 난무하는 폭동으로 묘사해야 했어요. 그리고 시위 참가자들은 국가전복을 노리는 불순세력이어야만 했죠. 그런데 제가 찍은 사진은 비폭력적이고 태극기를 든 애국적인 평화운동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문에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묻힐 뻔 했던 그의 사진은 한참 후 AP통신에 의해 빛을 본다.
“AP통신이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20세기 100대 사진을 선정했어요. 100년 동안 있었던 일 중 100가지 사건과 그에 대한 사진을 뽑았는데, 제 사진이 거기에 뽑혔어요. 사진기자로서 이보다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은 없었죠. 제가 찍은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속한 <한국일보>에서도 이 일을 대단히 크게 보도했죠”
박물관장으로 인생의 2막을 열다
기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지금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한 미디어기자박물관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정년퇴직을 준비하면서 귀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단양 쪽에 정착을 하려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영월에 빈 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영월군이 ‘지붕 없는 박물관 고을’이라는 이름으로 폐교를 박물관처럼 다시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해주고 있었죠. 그동안의 기자 생활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만들고 모았던 자료들을 이 공간에 전시하고 찾아오는 후배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생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결정이 정말 멋진 인생의 2막을 살게 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물관장으로 인생의 2막을 살고 있는 그는 박물관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이 박물관을 아이들이 자신의 꿈과 끼를 발견하고 피워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단순히 돈벌이가 목적이었다면 전 이곳에 오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자신의 흥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꿈을 찾고,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인재로 자라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제 사진의 저작권료 수익을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기자와 기자를 꿈꾸는 청춘에게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과 사명의식을 당부한다.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기자로 살아온 시절은 권력이 거짓과 억압으로 진실을 숨기려던 때였죠. 그것에 굴복한 기자도 있었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기자도 있었어요. 지금 기자로 있는 후배들이 그런 선배들의 노력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자가 짊어져야 할 사명에 대해 꼭 생각해봤으면 해요. 후배들이 기자의 사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꼭 가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자를 꿈꾸는 청춘에게 사명감이 없다면 다른 직업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기자라는 직업을 단순히 월급쟁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더 좋고 안정적인 직장이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자의 시각으로 기사화해 기록하고 알리고 싶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기자를 꿈꿨으면 좋겠어요”
덧붙여 그는 모든 청춘에게 꿈을 찾으라고 말한다.
“이곳을 찾는 학생들을 만나보면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이가 정말 많아요.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자신이 흥미 있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구체화해 꿈으로 삼으면 된다고 봐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우리 젊은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박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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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