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예민한 악기다. 습도, 온도, 조명, 사용 횟수 등에 따라서 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경에 따라 달라진 피아노의 음을 다시 잡아주는 사람을 조율사라고 한다. 이번에 만난 이종열 조율사는 60여 년 경력의 서울 예술의 전당 전속 피아노 조율사이다. 피아노 조율이 삶의 전부였던 길고 긴 그의 조율 인생을 들어보자.
조율에 빠진 소년
지난달 19일, 기자는 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이종열 조율사를 만났다. 주말임에도 그는 무대 위의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다.
“조율사는 주말이 있는 직업은 아니에요. 공연 일정에 맞춰서 피아노를 손봐야 하거든요”
그는 ‘소리의 고장’ 전주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양반 출신이었고 단소를 빼어나게 잘 불었다. 그는 어릴 적 할아버지 방에서 단소를 분 기억이 생생하다며 웃었다. 그 실력을 물려받았는지 기자 앞에서 직접 연주한 그의 단소 실력은 훌륭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직접 대나무로 단소를 만들었어요. 만들면서 첫 번째 위치의 구멍을 낮게 뚫으면 낮은 레가 되고, 높게 뚫으면 높은 레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첫 번째 구멍의 위치가 중요하구나’ 이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다 조율이었어요. 평범한 대나무에 음정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특히, 한번 들은 곡을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정도였지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모르게 음악에 흥미와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저 순수하게 음악 자체를 좋아했으니까요.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했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풍금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때는 학교에 풍금이 한 대뿐이라서 못 만지게 했어요”
고등학교 진학 후 그는 음악과 멀어진 삶을 살았다. 그가 진학한 공업고등학교에서는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학과로 진학한 그는 음악 대신 화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갈 계획이 없던 그의 고3 시절은 여유로웠다. 음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교회에서 우연히 본 풍금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교회를 갔는데 거기서 풍금을 봤어요. 풍금을 본 순간 너무 연주하고 싶더라고요. ‘내가 연주자가 되면 풍금을 연주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당장 책방에 달려가 오르간 교본을 샀어요”
그는 독학으로 오르간 교본을 일주일 만에 뗐다. 다음으로 그는 바이엘을 하루 8시간씩 연습했다. 바이엘을 다 뗀 후에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지만 노력을 거듭한 끝에 찬송가 580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독하게 하니까 결국 풍금 연주자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풍금을 계속 연주하다 보니 소리가 좀 이상했어요. 풍금 소리가 흩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이거 한번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기술자를 부르지 않고 직접 나섰다. 풍금 뚜껑을 열고 풍금의 구조를 살피며 소리가 나는 원리를 연구했다. 풍금은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 금속으로 된 판인 리드가 있는데 이 리드의 두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소리가 나는 원리를 깨달은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풍금을 고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옥타브 관계에 있는 낮은 도와 높은 도 사이에 진동수 비율이 1:2가 돼야 하는데 맞지 않았다.
“아무리 연구해도 안 되더라고요. 참다못해 시내에 있는 악기점에 가서 물어봤는데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결국 혼자 독학을 했는데, 일본에는 조율 관련 책이 있지 않겠냐는 친구의 조언에 눈이 뜨였어요”
당시 일본은 풍금을 직접 만들었다. 그는 당장 책방으로 달려가 일본에서 출판된 조율 책을 주문했다. 주문한 책은 당연히 원서였는데 문제는 그가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어 첫걸음> 책을 샀어요. 다행히도 일본과 우리나라는 통하는 한자가 많아서 조사, 동사의 변화 등만 공부하면 되더라고요. 그렇게 2개월 만에 대략적으로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이 됐어요”
그는 이 책으로 조율의 이론을 깨우쳤다. 책에서 알려준 이론을 바탕으로 실제 풍금에 적용하니 음이 남지 않고 옥타브 관계에 있는 음들이 딱 맞아 떨어졌다. 당장 교회의 풍금을 고치고 주변에 있는 다른 교회의 풍금도 고쳤다.
“고등학교 가을쯤에 시작해서 1년 만에 조율을 독학했어요.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미 조율의 매력에 빠져서 그만둘 수가 없더라고요. 이후 조율을 계속하고 싶었고, 조율을 직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었죠”
차근차근히 쌓은 노하우
군대를 다녀온 후 그는 전주 시내에 있는 작은 악기점에서 일했다. 작고 영세한 악기점이라 제때 월급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원하는 조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갑자기 악기점이 문을 닫았다.
“일자리를 잃고 나니 ‘이 일을 하면서 망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전공을 살려 취직할까 고민도 했지만 조율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더라고요.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더 넓은 곳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 서울로 올라왔죠”
그는 ‘수도피아노’ 공장에서 피아노 조율을 하게 됐다. 그는 그동안 풍금만 많이 접했지 피아노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공장에서 똑같은 피아노만 반복해서 접하고 연주하다보니 다양한 것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결국 수도피아노를 퇴사하고 ‘삼익피아노’로 옮겨 가정을 방문해 피아노를 조율해 주는 일을 했어요. 이 일을 하면서 제 이름을 많이 알렸죠. 회사 일 말고도 따로 소개를 받아서 부수입이 생길 정도로 바빴어요. 하루에 조율한 피아노만 8개 정도 됐으니까요”
너무 바빠져서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어졌을 정도였다. 이종열 조율사는 큰 결심을 하고 회사를 퇴사한 후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는 제가 능력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회사를 나온 후에 더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저에 대해서 좋은 소문도 나고 일도 많이 들어왔어요. 1982년에는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들어왔죠”
그때 당시 세종문회회관은 국내 최고의 음악 극장이었다. 당시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 이종열 조율사에게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 제의가 온 것은 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실력을 믿고 추천해준 결과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하니까 국내외 연주자들을 많이 만나게 됐죠. 그 연주자들에게 지적당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노하우가 많이 쌓였어요”
1988년 서울 예술의 전당이 지어진 후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로 예술의 전당 전속 조율사를 추천해달라는 공문이 왔다. 조건은 10년 이상 연주장에서 조율을 한 사람이었고,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당시 이종열 조율사밖에 없었다. 이종열 조율사는 1995년 서울 예술의 전당 전속 조율사가 됐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예술의 전당 조율사로 일했어요. 헤아려보면 연주장 조율만 거의 60여 년 정도네요. 여러 곳에서 일하고 지방 공연장도 많이 순회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경험들은 쓸모없는 것이 없었어요. 다 경력과 노하우가 돼서 빛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조율사로서, 인생 최고의 공연
이종열 조율사는 피아노를 조율하면서 실수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그는 조율에 있어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조율을 엉망으로 하는 것은 단순히 저만 망신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실수가 예술의 전당 실수고, 외국 연주자들에게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큰 요인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하려고 하죠”
그의 완벽함은 2003년 세계적인 피아노 거장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공연에서 빛을 발했다.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이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만큼 피아노 조율도 까다롭죠. 본인 마음에 드는 피아노가 없어서 직접 비행기에다 피아노를 갖고 왔어요. 그러고 저한테 조율을 부탁한 거예요”
평소라면 1시간 20분 이내에 끝날 조율이었지만, 더 철저히 해서 2시간이 지나서야 조율이 끝났다.
“다음날 연주가 끝난 후에 짐머만이 저를 불렀어요. ‘연주도 끝났는데 왜 찾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 보니 저한테 ‘쏘 머치, 쏘 머치’ 하면서 악수를 청했어요. 그다음 무대 위로 저를 데리고 가서 2,600명의 관객들 앞에서 제가 피아노 조율을 너무 잘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그때 정말로 기뻤어요. 까다롭고 완벽주의적인 피아노의 거장, 짐머만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기분이었죠”
그는 그 순간이 조율사로서 ‘가장 명예로웠던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한 우물만을 파기 위해서는
어느덧 조율을 시작한 지도 60여 년. 이종열 조율사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분야별 우수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선정해서 주는 명장 시스템에서 조율사로서는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피아노 조율 명장 1호가 됐다.
“처음 명장이 됐을 땐 기분이 너무 좋았고 자랑스러웠어요. 조율 분야에서는 최초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명장으로서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실력과 위치를 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제 그는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조율 노하우와 지식을 담은 조율 기술서적도 집필했고, ‘TUNING ART’라는 모임도 만들어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제가 늘 제자들에게 하는 말 중 하나는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내가 가진 기술이 완벽하면 일을 찾으러 이리저리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와요. 그러기 위해서는 늘 연습해야 하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안돼요”
또한 그는 고민과 갈등으로 불안한 청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길이 옳을까?’, ‘이게 맞을까?’ 하는 고민은 누구나 해요. 그런 고민이 찾아오는 순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굳건히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뭐든지 처음은 다 힘들어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흔들리지 말고 이뤄질 때까지 한길로 갔으면 좋겠어요. 우물을 파려거든 물이 나올 때까지 파세요”
김노을 기자
doce26@cbnu.ac,kr








김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