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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나
한평생 우리 소리를 품은 이용길 판소리 명창
제 935 호    발행일 :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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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서와 가장 잘 맞는 음악은 무엇일까? 이번 사람이슈의 주인공은 자신 있게 ‘판소리’라 말한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북 치는 사람)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가며 연행하는 장르이다. 장단에 맞춰 부르는 표현력이 풍부한 창(노래)과 일정한 양식을 가진 아니리(말), 풍부한 내용의 사설과 너름새(몸짓) 등으로 구연되는 대중적 전통은 지식층과 서민의 문화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판소리에 매료돼 무형문화재 춘향가 보유자까지 이른 ‘이용길’ 판소리 명창(이하 이용길 명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恨)이 있는 아이, 한(韓)의 소리를 품다

  “슬픔이 담긴 길을 걸었기에 한을 다루는 판소리에 더 끌렸지”
  이용길 명창은 1935년 김제시 백구면에서 출생해 5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그는 평생 한을 품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희노애락이 담긴 시골 장 판소리꾼들의 소리였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판소리 공연 시간을 길게 하는 풍습이 없었어요. 옛날 시골 장엔  장을 돌아다니며 짧은 시간동안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전 그런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듣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에겐 매일 하교 후 판소리를 구경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판소리 단원들과의 친분도 쌓였다. 인연이 된 단원들의 소개로 그는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취미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점점 판소리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게 됐어요. 84세인 지금까지 판소리를 부르고, 지도할 수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현재까지 전수되는 판소리는 다섯 마당으로, ▲수궁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가 그것이다. 17세에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22세에 이르러 근대 5명창 중 한 명인 이동백 명창의 제자 강장원 선생의 수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주로 수궁가와 춘향가의 토막소리를 배웠으며, 심청가도 일부 배웠다. 이후 30세에 박초월 선생에게 흥보가를, 32세에 정광수 선생에게 적벽가 중 ‘삼고초려’를 배웠다. 38세부터는 정권진 선생 문하의 이수자로 들어가 춘향가와 심청가 두 바탕을 이수했다. 그 후 성우향 선생에게 춘향가 완판을, 마지막으로 정철호 선생에게 적벽가를 사사했다.

한편의 판소리와 같은 그의 인생

  그의 전성기는 1972년 MBC 문화방송 <내고향 우리 가락> 프로그램에 장기 고정 출연을 하게 되면서 찾아왔다.
  “그 때는 각 방송사마다 판소리 관련 정규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매주 방송하는 국악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져서 안타까워요”
  1980년대에 들어서 그는 조상현 선생과 함께 다양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소리를 했다. 점점 명성이 높아진 이용길 명창은 해외 판소리 공연 요청을 받았고, 그의 소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울려퍼졌다. 1989년 그는 헝가리 등 동구권 9개국 순회공연을 마쳤고, 각종 고수대회에 출연해 명창의 소리를 들려줬다.
  “동구권 공연 후 일본에서 공연 요청이 왔어요. 그래서 일본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 일본 천황이 관람을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일본 천황이 직접 무대까지 올라와 저한테 악수를 청하기도 했어요”
  일본에서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일본 관객 중 일부는 한국어로 된 판소리의 특정 대목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판소리를 더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가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부르면 좋겠다는 의견을 듣고 판소리를 일본어로 부르기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판소리에 담긴 ‘희노애락’의 감정은 다 느낄 수 있어요. 판소리에는 단순히 음악적 요소뿐만 아니라 연극적인 요소가 있어서 사람의 심금을 울려요. 심청전 중 심청이가 쌀 삼백 석에 팔려가기 전날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짓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을 부를 때는 저도 눈물이 나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그의 인생에 ‘희’만 있진 않았다. 그의 판소리 인생의 큰 위기는 ‘결혼’으로 인해 닥쳤다.
  “보통 판소리꾼들은 소리를 하다가도 결혼에 걸려 판소리를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요. 판소리를 취미로 하는 것은 쉽지만, 전문적으로 깊게 하면 어렵거든요. 또, 경제적인 이유로도 많은 이들이 판소리를 그만둬요. 특히 남성 판소리꾼들은 더 그렇고요. 결혼으로 생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수입이 있어야 하는데 판소리만으로는 그게 어렵기 때문에 그만두게 되는 거죠. 저도 그런 위기가 찾아왔어요. 아내가 ‘당신 판소리 계속하면 이혼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었어요. 그래서 소리냐, 가정이냐를 고민했었죠”
  그는 자신의 꿈도 소중했지만 가정도 소중했기 때문에 수많은 고민 끝에 가정을 택했다.
  “소리를 안 하려고 북을 칼로 찢어버리며 판소리를 그만두겠다고 맹세를 했었어요. 결혼하고  5년간 국악계를 떠났었죠. 가정을 위해 국악과 관련된 사람들과 연락도 끊고 살았어요”
  하지만 그의 판소리에 대한 열정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 때문에 2번이나 이혼의 위기가 찾아왔다.
  “정말 판소리를 하고 싶어서 조금씩 조금씩 아내를 설득했죠. 그래서 가정과 판소리 모두를 유지해가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는 현재 전북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지정됐고, 인간문화재로도 지정돼 있다.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결정되는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즉 인간문화재가 되는 과정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문화재청에서 치는 시험이 또 만만치 않았어요. 1차 시험에서 천 명 중 백 명이 뽑히고, 직접 창을 하는 실기시험에서 백 명 중 한 명이 뽑히는 거죠. 제가 인간문화재가 됐을 때, 그 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았어요”

그가 앞으로 꿈꾸는 소리는

  그는 현재 우리나라 판소리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자꾸 국악 프로그램이 없어져요. 결국엔 창극 드라마가 다 없어지고, 지금 KBS <국악 한마당>만이 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는데, 그 프로그램이라도 있으니 참 고맙죠. 판소리와 관련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우리 전통 음악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는 판소리를 유지하고 지키고자 그의 이름을 건 판소리 전수소를 서울과 전북 김제에서 운영하고 있다.
  “판소리에 대한 지원 및 운영 체계 정립과 국가적 지원 확대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아직 나라에서 판소리에 대한 후원이 딱히 없어요. 그래서 제가 사적으로 건물을 빌려 전수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참동안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하더니, 곱게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루고 싶은 것은 따로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로 인정받고 대접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죠. 제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후진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좋은 소리를 전수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소리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가 판소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판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온 거에요. 한때는 오전 11시부터 시작해 오후 3시까지 소리를 했었어요. 밥을 안 먹어도 소리만 하면 배고픈 것을 싹 다 잊어요. 저 자신이 좋아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계속 판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죽기 살기로 하지 않고는 무언가를 할 수 없어요. 어느 분야건 간에 자기가 좋아하면, 일단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해요”
  그는 20대 청년들을 위해 조언을 덧붙였다.
  “젊을 때는 우선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해요.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아주 세밀히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라는 이용길 명창의 말에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물었다.
  “젊을 때는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많이 경험해보고 나와 맞는 분야가 있으면 깊게 파고들어야 해요. 학교에서의 배움도 열심히 하고, 이외의 시간을 활용해 많은 경험을 하면서 내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분야에 열중해야 해요”

  그에게 판소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손을 꼽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 끝에 그는 꾸밈없는 자신의 솔직한 말을 내뱉었다.
  “판소리는 제 혼이에요. 판소리가 없으면 저는 없는 사람이에요. 판소리가 있기 때문에 제가 존재하고 여러 사람들한테 좋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거죠”
  판소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배가 고플 때도, 아플 때도 소리를 하다보면 잊어버려요. 제가 판소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렇게 학생들도 좋아하는 걸 찾아보세요. 그럼 인생 살아가면서 크게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윤이나 기자
inajoa6338@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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