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올린과 함께 걸어온 17년의 길
그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과도 같았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중에는 집안 대대로 음악을 해 온 사람이 많지만, 그의 부모님은 음악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6살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집 앞 악기점에 저를 데려가면서 바이올린과 저의 인연이 시작됐어요. 그때 제가 직접 고른 바이올린으로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 후 8살에 처음 나간 소년한국일보 콩쿠르에서 동상을 탔는데, 그때부터 비로소 제가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죠”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그는 예술의 전당 영재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무서운 선생님을 만났어요. 곡뿐만 아니라 스케일(음계), 에튜드, 연습곡도 다 외우게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하루에 7시간 정도 연습했는데 하루 대부분을 연습하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는 그때 배운 것과 7시간의 연습이 지금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여러 악기 중 특히 현악기는 조기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손가락의 유연성은 어릴 때 형성되거든요. 또, 그때 연습곡과 에튜드를 외웠던 고통이 현재 카프리스 같은 기교적인 곡을 연주할 때 상당한 도움이 돼요. 한국의 음악 교육은 기교적인 면을 중시하는데 그 부분을 영재 아카데미에서 갖췄다고 할 수 있죠”
영재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마친 그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 김남윤 선생님을 만난다. “11살에 ‘일본 이시카와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해 우리나라 바이올린계의 대모이신 김남윤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됐어요. 그때의 인연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해 선생님께 7~8년 정도 배우며 여러 콩쿠르에도 참가했죠”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콩쿠르를 준비할 때 제자의 실력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이셨어요. 원래 레슨이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매일 저를 부르셔서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셨죠.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끈기와 헌신, 노력을 배웠고 그 가르침은 아마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는 김남윤 선생님을 떠나 유학을 갔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2012년 독일 하노버 요아힘 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 나가 4등을 했어요. 대회 참가 과정에서 반주자, 심사위원과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제 고민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유학을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으로 진학했어요. 미국에서 공부한 5년의 세월이 저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보완할 수 있는 시간이 됐죠. 우리나라에서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실력이 좋은 저를 질투하고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유학을 가서 보니 남이 잘하는 점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가장 좋았어요. 그런 태도의 차이가 저에게 크게 와닿았어요”
파가니니와의 음악적인 교감
2015 파가니니 콩쿠르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상당히 뜻깊고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을 기회이자 그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 대회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이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인모니니’라는 별명도 얻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이블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저 대회는 언제 나갈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제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미리엄 프리드 교수님께 사사하고 있는데 그분도 1968년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자셨어요. 그분께 제 생각을 말하고 조언을 구했더니 한번 나가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죠. 사실 교수님이 다른 학생에게 콩쿠르 참가를 추천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말이 더 저에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는 파가니니 콩쿠르 참가 자체가 특별했지만, 운영 방식도 색달라 더욱더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파가니니 콩쿠르 참가자들이 묵었던 호텔은 방음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참가자들이 방에서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를 연주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죠. 어떤 참가자는 고의로 새벽 2시에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이 참가했던 사람들은 호텔 안내데스크에 소음으로 신고를 하기도 했었죠. 총 3차까지 진행되는 파가니니 콩쿠르 중 1차 콩쿠르 날에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대부분 콩쿠르는 참가자들을 모아놓고 공식적으로 수상자나 본선 진출자를 발표하는데, 이 콩쿠르는 호텔 방문 밑으로 직접 결과를 통보하는 종이를 넣어주더라고요. 색다른 경험이었죠”
파가니니 콩쿠르로 명성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얻었지만 가장 설렜던 것은 파가니니가 실제로 사용하던 바이올린으로 독주회를 가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파가니니가 실제로 사용하던 바이올린은 캐논 즉, 대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요. 이 악기는 평소에는 금고에 보관되다가 우승자가 나올 때만 연주되는 악기거든요. 그래서 처음 연습을 시작했을 때에는 소리가 나지 않아 당황했지만 계속 연주를 하다 보니 악기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저는 이렇게 좋은 바이올린은 처음 연주해봤어요. 캐논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소리가 굉장히 크고 남성스러웠죠. 연습 시간이 4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워낙 특별한 악기이다 보니 영적인 경험을 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어요”
끝없는 노력의 결정체
17년 동안 바이올린과 함께해온 그는 직업병으로 굳은살과 바이올린 히끼(알레르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오래 하다 보니 손가락에 굳은살이 많이 생겼어요. 수년간 굳은살과 함께해온 탓에 가끔 굳은살이 벗겨진 상태로 연주를 하면 기분이 이상해요. 또, 바이올린에 있는 금속이 목에 닿아 바이올린 히끼가 생겼는데 저는 유독 심각해 수술까지 해봤지만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생각해요”
탄탄한 기본기와 계속된 연습으로 무섭게 성장해나가고 있는 그도 실수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있다. “저도 사람이라 항상 실수 가능성을 안고 있죠. 하지만 실수에 대처하기 전에 철저한 연습으로 그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실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잊고 남은 연주에 매진하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더라고요. 미국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파멜라 프랑크는 실수할 것 같다는 공포감이 들면 무대에 서자마자 바로 실수를 해버린대요. 저는 그럴 용기는 없는 사람이라 빈틈없는 연습으로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해요”
그는 무대에서 실수로 이어질 수 있는 긴장감에도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대에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최대한 대비하는 연습을 하려고 해요. 예를 들면, 무대에서 긴장해 손이 차가워지는 경우를 대비해 얼음물에 손을 넣어 차갑게 만든 후 연습을 해요. 또, 호흡도 수많은 연습을 통해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며 음악과 교감하려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누군가의 앞에서 연주하는 거예요. 누군가를 위해 연주한다는 긴장감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거죠”
더 높은 목표를 향해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음악을 하면서 많은 콩쿠르에 참가해 입상했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도 나가보고 싶어요. 역대 우승자를 보면 유명한 이름들이 가득하고 우승하게 되면 상당히 많은 명예와 혜택을 얻거든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세워놓지 않았지만, 꼭 나가 보고 싶은 콩쿠르 중 하나죠”
클래식 연주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에 대해 그는 오케스트라와의 부족한 연습 시간을 말한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게 되면 연습할 시간이 이틀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아요. 연주는 무사히 끝낼 수 있지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좀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요. 그래서 앞으로 음악적 뜻이 같은 파트너들을 많이 만나 그들과 음악에 대한 논문을 읽고 오랜 기간 연습하며 정성을 들인 음반을 제작하고 싶은 거죠. 저는 이 부분이 클래식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클래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종합 아티스트가 되고자 한다. “재즈 바이올린을 배워서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 브레드 멜다우와 콜라보레이션을 해보고 싶고, 재즈나 힙합곡을 바이올린에 맞게 트랙을 직접 만들어서 연주해보고도 싶어요. 얼마 전에는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가수 딘의 인스타그램이란 가요를 편곡해서 연주했어요.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 딘 씨와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드러낸 그는 작곡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작곡을 처음 시작한 건 8살 때부터예요. 물론 아무 것도 모르고 오선지에 그려 넣는 정도였죠. 지금은 오선지에 작곡하는 것보다 ‘로직 프로’라는 프로그램에서 비트나 가상 악기를 사용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앞으로 ‘사운드클라우드’에 제가 만든 음악을 올리고 익명으로 사람들의 평가도 들어보고 싶어요”
청춘들에게 보내는 소리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신경 쓰기보단 자신의 소신을 따르라고 조언한다.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이 음악 외적인 요소에서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어요. 본인이 음악을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그런 부분을 너무 신경 쓰기보단 음악 그 자체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흥미와 뜻이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는 23살의 젊은이로서 우리나라의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단 현재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실천하는 게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만족감보단 하지 못했을 때 오는 후회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거든요. 어떻게 보면 젊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끊임없이 도전하면 어느새 성장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김채완 기자
kimchaewan@cbnu.ac.kr








김채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