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술 기자의 첫인상은 외모도 목소리도 아닌 그의 차량에서 느낄 수 있었다. 차량 뒷좌석에 놓인 느슨한 끈의 카메라 한 대와 트렁크를 열면 보이는 드론, 라면에 낡은 침낭 하나. 강이 곧 집인 그를 닮은 평범하고도 특별한 차량이었다. 강가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소중히 움켜잡은 그의 손은 거칠었고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눈에 보였다. 10년 동안 금강을 지켜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민기자 김종술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금강요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기사를 쓰는 기자지만, 김종술 기자는 처음부터 기자의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 문득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어요. 처음엔 생활 수기로 시작해 라디오, 대회 등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 제의를 받아 본격적으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됐죠”
기자라는 직업을 택하고, 그는 지역 사업과 관련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이 시작된 후로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시민기자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돈도 못 버는 짓을 왜 하냐, 소용없는 짓이다’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그는 그 일이 좋았다. 이제 강은 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강이 ‘삶’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17년 전, 서울에서 의류무역업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다가 지역신문사의 요청을 받고 공주시로 오게 됐다. 곰나루(현 곰나루국민관광단지)와 모래톱으로 이어진 금강을 본 그는 한눈에 반해버렸다.
“지금은 수몰된 장성댐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일을 나가실 때, 어머니가 빨래하실 때 저는 강 옆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기다렸죠. 그 강을 보자 옛 생각이 나서 그날부로 짐을 싸고 서울에서 곧장 내려왔어요”
지역신문사 기자로 있으면서 그는 공주의 자연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그리고 그 주변의 채석장, 산업폐기물장 등을 취재했다. 그러던 중 ‘4대강 사업’을 취재하게 된다. 당시 정부는 이전에 추진해오던 대운하 사업이 어렵게 되자 4대강 사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정부의 발표와는 달랐다.
“기자는 중립적인 시각을 가져야 해요. 언론으로서 당연히 그 공사가 얼마나 정당하게 이뤄지고 있는가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죠.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왔어요. 왜 지역신문사 따위가 정책사업에 신경을 쓰는지 협박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죠. 하지만 국민도 그 사업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취재에 임했죠”
틀에 구속받지 않고 4대강 사업을 취재하기 위해 그는 신문사의 사장직을 내려놓고 ‘시민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4대강 사업을 취재하며 주요 언론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시민기자로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에 열중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힘든 점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매일매일이 힘들지만, 2012년도부터 2014년도가 제일 힘들었어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2012년도 가을, 4대강 사업이 끝나자마자 낙동강과 금강에서는 물고기 떼죽음 사태가 벌어졌다. 강에서 죽어간 물고기는 총 60만 마리였고, 사체를 담은 자루는 쉴 틈 없이 채워졌다. 공식적으로 10일간 벌어진 이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그는 13일을 강변에서 살았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눈앞에 보이는 처참함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을 남겼다.
“한창 취재 중이던 어느 날 새벽이었어요. 강가에 뭔가 큰 물체가 떠 있더군요. 사람인 줄 알고 놀라서 가까이 갔는데, 135cm나 되는 토종메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강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생명체가 죽어 떠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어요. 그날 이후 몸과 마음이 지쳤어요. 공황장애까지 왔죠. 종종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어요. 정신과 상담을 받아가며 기사를 썼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와 문자, 심지어 인터넷 댓글에서도 비난이 쏟아졌죠. 억울하고 허탈했어요.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었죠”
4대강을 취재하던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약 2년간 기사 쓰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그는 매일같이 전화와 문자 그리고 욕설에 시달렸다. 또 솔깃한 제의를 하며 회유하는 곳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부장직을 준다, 높은 급여를 준다고 제의가 왔어요.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솔깃했어요. 하지만 ‘내가 4대강 취재를 왜 하는지’ 생각해봤죠.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환경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고, 우리 모두 신경 써야 할 문제잖아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현장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러나 힘들게 다잡은 그의 마음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김종술 기자에게 2014년은 잊지 못할 '최악의 해'라고 한다. 그동안 수입이 없었던 그는 가족들한테도 친구들한테도 많은 빚을 졌다. 은행에서 대출도 받았다. 채권추심 직원이 밤 10시까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그는 결국 2014년에 파산을 하고 말았다. 더는 취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 그는 온 집안을 뒤져 돈을 찾았다. 그렇게 나온 돈은 겨우 2,650원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책상 위의 오래된 컴퓨터와 집 밖엔 압류딱지 붙은 차밖에 없었다.
“다시는 기사를 쓰지 않을 생각으로 3,000원을 받고 고물상에 컴퓨터를 넘겼어요. 합쳐서 5,650원을 손에 쥐니 눈물이 났어요. ‘내가 이러려고 몇 년을 힘들게 살았나’라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그러다 ‘마지막 취재’를 하자는 마음에 무릎을 털고 일어났죠. 보온병에 수돗물을 가득 담고, 시장에서 5,600원어치 빵을 산 후 노트북을 들고 길을 나섰어요. 그렇게 부여군까지 갔는데 식량이 떨어졌어요. 차비도 없어 사천까지 걸어갔는데 너무 지치고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강가에 쓰러졌죠. ‘끝났구나’하는 생각으로 한참을 누워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물속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꿈틀거렸어요”
이날 돌에 붙어있었던 것은 김종술 기자의 인생을 한순간에 전환시킨 ‘큰빗이끼벌레(피후강 빗이끼벌레과에 속하는 태형동물의 일종)’였다.
“발견 즉시 전문가와 환경단체에 연락해봤어요. 모두 ‘모른다’는 답변만 내놨죠. 불확실한 정보로 기사를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벌레를 직접 잡아 손에 문질러보기도 하고, 다리를 뜯어서 먹어보기도 했어요.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두통이 밀려왔죠. 밤새도록 울부짖다시피 하며 강변을 굴렀어요. 그렇게 ‘하늘이 준 마지막 기사’라고 생각하며 기사를 썼죠. 다음날 여러 언론과 기자들에게서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어요. 알고보니 제가 최초로 발견한 생물 이었어요”
‘큰빗이끼벌레’의 발견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취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그에게 사람들은 ‘금강의 괴물기자’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행복을 가까이에서 찾다
그가 지난 10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거나 깨달은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그는 네 가지를 말해 줬다.
# ‘금강요정’ 김종술
“어느 날, 저를 비난하던 수많은 댓글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던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같이 인권 교육을 받았던 학생이 댓글을 썼더군요. ‘내가 아는 김종술 기자는 정말 강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진정한 금강요정이다’라는 내용의 댓글이었어요. 그 덕에 언론에서 저를 ‘금강요정’이라 불러요”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여러 상장과 상금을 받았어요. 근데 받은 상금은 금방 없어져 버려요. 시상식에서 돈을 받아도 금강을 취재하는 데에 다 써버리기 때문에 돈이 쌓이지 않아요. 그래서 빚을 내서 기사를 쓰죠. 빚이 쌓이고 쌓여 지금도 많고요. 남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금강을 위해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아요”
# ‘녹조라떼’를 마시다
“제 기사를 읽고, 저의 열정을 인정한 독자들이 후원한 돈으로 투명카약을 구매해 낙동강을 횡단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일명 ‘녹조라떼’를 떠서 직접 마셔봤어요. 직접 연구할 수는 없으니 마셔본 거죠. 녹조 현상의 해결법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요. 4대강 사업 전의 강이 그리워요. 강을 되찾을 때까지 저는 몸을 사리지 않고 취재할 겁니다”
# 김종술의 소.확.행
“취재하다 힘이 들 때면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끌고 강가에 나가요. 차 위에 누워서 별도 보고, 뛰어노는 고라니도 봐요. 강가에 나온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도 들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요즘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강에 가지 않는 것 같아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근처의 산이나 강으로 나가 자연을 느껴보면 좋겠어요”
우리의 관심이 강을 되살린다
김종술 기자에게 강은 어떤 의미일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은 저에게 어머니의 강이자 친구의 강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강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강은 저한테만 소중한 게 아닙니다. 강이 오염되면 우리의 삶도 오염됩니다. 작년 여름에 처음으로 공주보 수보가 열렸어요. 겨우 20cm였지만 희망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수문이 열리면 강이 정화가 되는 효과를 가져와요.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관계자들은 더 이상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박을 계속하고 있어요. 여러모로 힘든 싸움이에요. 여러분이 이전보다 더 강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자연은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안세린 기자
kcbjcs99@cbnu.ac.kr








안세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