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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채 & 양서영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살아 있는 역사,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서현석 대표
제 955 호    발행일 : 202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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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의 중심, 고즈넉한 한옥의 멋이 살아 있는 관광도시 전주에는 특별한 공연장이 하나 있다. 2001년 처음 문을 열어 지난해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3층 2,037석 규모의 다목적공연장으로 전통 창극은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 현대무용, 대중콘서트까지 수많은 공연이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전북도민의 문화예술 향유의 폭을 톡톡히 넓혀 주고 있다. 그래서 이곳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을 예향 전북의 자랑을 넘어 한국 문화콘텐츠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정진해 나가는 서현석 대표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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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로 첫발을 내딛던 순간

  30여 년간 공연예술은 물론 연극과 영화의 기획, 연출, 제작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공연 전문가로 인정받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CEO 자리에 오른 서현석 대표지만, 이런 그에게도 ‘첫’ 시작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가 처음 공연예술계로 발을 내딛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65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제4회 전국아동극경연대회>에 참가하며 주인공을 맡았는데, 최우수연기상을 받게 됐어요. 바로 그해, 동양방송(現 JTBC의 전신) 아역탤런트 공채로 뽑히면서 아역배우 일을 시작하게 됐죠”
  어린 나이에 배우 생활을 시작한 서 대표에게 기자는 학업과 연극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어려서부터 연극을 아주 철저하게 배웠지만, 병행하는 일 자체가 힘들다 느껴진 적은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다니던 학교에 연극부도 있었지만, 따로 가입하지는 않았어요. 기억에 남는 건 독서를 참 많이 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시중에 희곡책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문학 전집에 수록된 희곡이란 희곡은 거의 다 읽었고 국내외 문학 전집, 다큐물 전집 같은 종류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의 저에게 평생 양식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고3 때는 연극전문학교에 진학하려고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는데,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나의 영역을 너무 일찌감치 작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철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항상 철학에게 미안한 건, 철학과를 그저 다니기만 했지 공부는 별로 안 했어요. 수업은 빼먹고 연극만 줄창 해댔죠. 공부에 쫓겨본 기억이 없어요.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대학 생활을 했죠”

배우 생활을 버리고 ‘무대 뒤’로 향했던 이유

  초등학생 때 시작해 대학생 때까지 꾸준히 배우로 활동하며 무대에 섰던 서 대표는 졸업 이후, 줄곧 해오던 ‘배우’가 아닌 ‘제작스태프’로 연극에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에 배우를 하겠다고 하는 분들은 배우만 했어요. 하지만 ‘연극’을 한다는 건 배우뿐만 아니라 연극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었죠. 일인다역이랄까. 저 같은 경우에는 못 되거나 안 되는 일을 두고 보지 못하는 체질이라 무대, 의상, 소품 제작, 조명, 특수분장 등의 스태프 일은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 전단 배포, 티켓 번호작업, 보도자료 제작, 카피 작성, 무대감독 등등은 물론 기획 일도 했었죠. 하기 싫었다면 절대 못 했을 일이죠. 좋으니까 했고, 아직도 하고 있어요”
  기자가 그에게 스태프로 일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묻자 기다렸다는 듯 많은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얼핏 생각나는 게, 노경식 선생님의 <달집>이라는 극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소품도 제작했었는데 관객들이 제가 만든 명태와 물오징어 소품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했답니다. 이현화 선배님의 <산씻김>에서는 벌레 소품을 만들었는데 정말 소름끼쳤다고 하더라고요. <카덴자>라는 극에서도 고문 장면에 나오는 철퇴와 인두 소품은 냄새와 연기까지 실감이 난다며 객석에서 놀랐던 기억이 스쳐 가고요. 이런 일들 때문에 지금도 별명 중 하나가 ‘서소품’이에요. 제가 정말 아끼는 별명입니다. 이외에도 공연 스태프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순간은 수없이 많지만, 연극에 대한 내 지식과 자부심을 거의 180도 바꿔버린 공연이 하나 있습니다. 러시아 국립극단 말리극장 초청 <벚꽃동산>입니다. 아마 개인적인 제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연극계에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극을 통해 리얼리즘 연극의 실체를 처음 알게 됐어요. 당시 말리극장장이셨던 유리 솔로민이라는 분은 러시아연방 문화성 장관을 하신 인민배우 출신으로,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을 수상한 영화배우이기도 하셨어요. 그분께서 한국에 머무시는 일주일 동안 매일 틈날 때마다 제게 연극 이야기를 해주시고, 또 보여주셨어요. 귀국하실 때는 나를 아들이라 부르겠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어떤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무대

  서 대표는 대학 시절 <사계절의 사나이>와 <출세기>를 연출했고, 졸업 이후에는 <락스트리트>, <장생가>, <클레오파트라>, <도적들의 무도회>, <화니와 마리우스>, <벚꽃동산>, <천민귀족> 등 여러 굵직한 공연에 기획 및 제작으로 참여하며 대한민국 공연예술계에 그만의 족적을 남겼다. 그런 그에게 기자는 ‘슬럼프’라는 순간이 있었는지 물었다.
  “슬럼프라고 말할 건 그다지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순수한 열정으로 임했는데, 한참 후에 알고 보니 아부용 행사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된 적이 있어요. 그 추운 밤에 학생들과 함께 밤샘을 하는 교장선생님, 이를 지켜보며 함께하는 예술행정가가 있어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 알고 난 후에는 너무 창피했었죠. 그나마 돈을 한 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 자존심을 위로했어요. 그 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조금 뜨게 된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고 한다면 대학 졸업 후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이죠. 연극은 쉬지 않고 하는데도, 어느 때는 차비가 없어 눈물을 참으며 여의도에서 시흥까지 걸어간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연극을 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지 몰랐었죠. 그러다가 86년 아시안게임 개최에 쓰이는 문화예술축전 에 임영웅 선생님께서 조연출을 맡겨 주셨는데, 주최가 관공서라 그런지 돈이 입금이 되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행사의 흐름을 알게 돼서 콘서트, 패션쇼 등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게 됐는데 연극을 하며 익힌 노하우 덕분에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됐죠”

  연극에 몰두하던 그는 어떤 계기를 통해 여러 장르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극단을 창단하고 공연 전문 기업을 설립했으며, 영화도 제작했다.
  “저에게 결혼하고픈 여인이 나타났고, 저를 늘 믿어주신 어머니에게 암 선고가 내려지게 되자 제가 돈이 너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그 후로 ‘돈이 있어야 한다’라는 궁리를 하게 됐죠. 연극만 고집하던 제가 다양한 장르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사업을 벌이게 된 가장 큰 계기입니다. 앞서 말했던 야비한 경우(아부용 공연)가 아니라면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한 주어진 일들을 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제가 됐어요. 또 원체 하고픈 것이 많았던 것도 한 몫했죠. 사람들은 현재가 과거가 된 한참 후에야 자신의 길을 보게 되죠. 뒤돌아보니 나름 잘 살아왔고, 또 잘 살고 있다 싶어 스스로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에게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란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대학 졸업 후에는 소극장 제작스태프, 무대감독, 영화제작자, 공연기획사 CEO, 영화제 및 포럼 개최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열심히 질주하던 시절을 지나 마침내 서현석 대표는 예향 전북의 자랑, 전북도민의 복합문화예술공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CEO의 자리에 올랐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개관을 앞뒀던 시기, 2000년에 예술감독으로 2년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근무했어요. 내려오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였는데, 서울 ‘예술의전당’ 다음으로 가장 큰 복합공간이라는 점, 국내 최초의 민간 위탁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점, 그리고 당시 최고의 극장시스템을 지닌 극장의 첫 예술감독이라는 점, 또 한편으로는 영화 제작 이후 일생 처음으로 닥쳐온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에 대한 혼란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욕망... 여러 상황들이 저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으로 향하게 했어요. 개관을 앞두고 할 일이 엄청 많았어요. 일에 파묻혀 밤샘을 밥 먹듯 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때의 저에겐 힐링이었죠. 개관일인 2001년 9월 21일을 앞두고 밤을 지새우던 9월 11일 밤,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뉴스 화면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연을 맺게 된 서현석 대표는 정확히 18년 후 2019년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CEO로 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현 수탁재단인 우석학원 이사장님께서 제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CEO 부임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 제안을 듣자마자 저는 바로 고맙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개관 후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았지만, 급히 떠나야 했기에 늘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걸 해소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에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저에게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너무나도 고맙고, 또 좋은 공간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예향 전북의 정통성을 키우고 잉태하는 산실로써 맏형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공연예술계 선배로서 관련 진로를 꿈꾸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일단은 내가 이 일을 ‘안’ 해도 되는지부터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리고 안 해도 된다면, 하지 마십시오. 관객이 되면 되니까요. 후원자가 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데 ‘좀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해 보셔요. 그러다가 재미도 없고, 자발적으로 신이 안 난다면 물러나세요. 남이 잘한다고 하면 더 좋고, 못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재미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풍덩 빠져 나를 변화시켜 보세요. 단, 이제는 남의 칭찬, 나의 잘난 것을 버리고 ‘쟤는 00에 미쳤다’라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쭉 달려 보세요. 그렇게 한다면 언제일지는 몰라도 꼭 기회가 올 겁니다”


정윤채 기자 sunwillrise@chungbuk.ac.kr
양서영 기자 ysyoung@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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