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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연자방아 전설 (4)
제 946 호    발행일 : 2019.11.11 


  이튿날 석순이가 일어나라는 재촉에 이불을 걷어찼다. 동생들이 안방으로 들락날락했다. 문 여는 틈으로 보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어젯밤보다는 조용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이미 술 취한 아버지는 없었다. 나는 전날이나 다름없이 그날을 뛰놀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은 차츰 메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집에 있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묻혀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날부터는 집안에 그 꼴로 있는 것이 아버지의 직업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주망태가 돼서 통금 사이렌과 함께 대문을 두들겨댔다. 그런 날이면 한 차례씩 집안이 들끓었다. 이런 생활이 십여 일 계속되고서야 아버지가 실업자가 된 것을 알아챘다.
  술 취한 아버지는 전과 달랐다. 말수가 늘고, 어머니에게 투정할 틈도 안 주었다.
  “한명운이가 제깐 놈한테 월급 십여만 원에 매여 있을 것 같아. 안 매인다. 안 매여.”
  아버지는 주정 속에 이런 말도 섞었다. 그러나 그런 호통 뒤에는 언제나 한숨이 따랐다. 이 무렵부터 나는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런 어수선한 생활도 근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신록이 짙어가는 5월 중순 우리는 C시로 이사를 했다. 석순이도 고향으로 갔다. 이것은 석순이는 사모님과 같이 살 사람이지 탁주꾼 마누라와 같이 살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훨씬 후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3십만 원을 횡령한 협의로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C시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작은아버지가 고무신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C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곳은 아니었다. 쓰라린 생활을 하려고 C시로 기어들었나 싶을 만큼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 있을 때면 등신처럼 애나 업고 서성거리는 것이 일과였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가면 공식처럼 술 단지를 뱃속에 마셔 넣고 들어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돈벌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끼니를 굶지 않는 것만이 신기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한계가 있었다. 어른들은 거의 날마다 싸움질을 했다. 이런 것으로 늙어갔다. 한가지 변화가 늙는 방법마저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주정을 벌일 때면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구석에서 떨어야 했다. 이럴 때는 지옥이 우리 집에 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옥 판을 벌이는 생활도 변하여 가기 마련이었나 보다. 하루는 모처럼 어른들이 다정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도로공사에 일자리를 하나 구했다고 했다. 이튿날부터 아버지는 집안에서 궁상를 안 떨어도 됐다. 나도 가슴이 후련했다. 그러나 K시에서의 생활이 몸에 배서 그런지 내 기분에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영운이가 제깐 놈에게 월급 3십만 원에 매여 있을 것 같으냐’던 아버지의 주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한XX공사라는 연자방아를 벗어났을 때 어떻게 됐나? 역시 고삐를 벗는다는 것만이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매여 있던 고삐에 다른 사람이 매이고, 아버지는 고삐를 풀은 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새끼 달린 어미 양의 신세가 됐다. 모가지의 고삐를 풀자 새로운 밧줄이 아무 데나 마구 묶어 댔던 것이다. 사람이란 어떤 연자방아간 하나씩은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아담의 서글픈 설화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도로공사의 일자리는 별수 없이 아버지가 돌려야 하는 새로운 연자방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도 그리 신통한 것이 못되었다. 아버지는 새로운 고삐에 대한 불만을 술이라는 요정의 치맛귀(치마의 모서리 부분)에 매달려 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한 달에 열댓 번씩은 만취가 돼서 집안에 지옥 판을 펼쳤다. 어머니는 벌떡증이 심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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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한 사모님에서 하루아침에 주정뱅이 마누라로 코가 짜부라든 것을 생각하면 세상이 무섭다 못해 싫어지기도 했다. 이런 유령 같은 화근을 피하려고 어머니는 군밤 장사하는 철이 아니면 빵 함지를 이고, 쉴새 없이 시가를 돌았다. 그러나 날이라도 궂어지면 기억이란 마녀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옛날을 들추어내서 눈앞에 흔들어 댔다.
  지금 이 아버지를 만나기 전 나를 데리고 고생하던 일. 그러다가 한명운 씨를 만나 거드럭거리며 살았던 9년간의 생활. 이렇게 생각을 계속하다 현재에 다다르면 왈칵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럴 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과거의 필름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현재에서 영상이 딱 멎을 때 어머니는 앞날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비볐다. 분명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나머지 필름에 어떤 것이든 사진이 찍힐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에 대한 야릇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허황한 기억의 마녀를 걷어 차버리곤 했다. 또 하나 눈앞에 우쭐대는 아이들을 볼 때 어처구니없는 옛날에의 집착을 그만둘 수 있었다.
  ‘아무렴 어때. 사람은 변화 속에 사는 것인데 어린애처럼 투정 속에 살던 생활이 그리울 것이 뭐람? 나는 어엿한 이 집의 화통(기둥머리에 십자꼴로 도려내어 도리나 보가 물리도록 하는 자리)인데.’
  사람은 마음 편한 방향으로 생각을 돌릴 줄 아는 잔꾀가 있는 존재였다. 얼굴이 부끄러우니 뭐니 하는 따위의 장식적인 말은 석기시대의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까? 배꼽, 불알 모두 들어내고 돌칼을 열심히 갈고, 무르익은 열매나 찾아 헤매던 그 판에는 넋을 빼도 그따위 말은 지껄여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비 막을 곳이 생기고, 앞가릴 거적이 장만 된 후에 나온 것이다. 어머니도 우선은 돈 버는 것만이 전부였다. 이런 구구한 이론의 결론이 어머니가 군밤 장수라는 연자방아를 돌리는 데 힘이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짐 안진 사람이 어디 있더냐?’
  어머니는 오리다리목에 매여 앉아 지나가는 이들 하나하나가 자기 연자방아를 끌고 뺑뺑이 질을 치는 것을 보았다. 죽을 때까지 돌아도 아무것도 찧어지지 않고 다리만 아픈 소 같은 신세도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자신도 그중의 하나일 것만 같았다.
  ‘얼마고 돌다 보면 까슬까슬한 보리들이 곱살한 보리쌀로 변하는 것처럼 궁상맞은 하루일망정 되풀이하다 보면 무엇인가 그때의 짐은 무게가 없어질 것이다. 그 짐의 무게를 잊으려고 어머니는 모든 기대를 나에게 걸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연자방아는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전은 모실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런 불경기에도 나는 학교 다니는 중에 돈이 그리 궁색함을 몰랐다. 그랬건만 나는 학교공부에는 욕지기를 내고 있었다. 그보다는 이곳저곳 마음껏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어머니 모르게 동리 애들과 극장에 가는 날에 제일 날개가 돋쳤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늦가을이다. 바로 6.25가 나기 전해지만 어머니의 돈주머니도 이웃 장사들의 그것처럼 검다 못해 번쩍번쩍 윤이 나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 되면 훠훠 바람이 거세졌다. 연기가 분주히 머리를 풀었다. 이따금 오리다리를 건너오는 바람이 어머니 목판에도 모래를 뿌렸다. 바쁜 걸음들이 쉴 새 없이 오리다리를 오갔다. 이쯤의 아버지는 말씀이 아니었다. 술 안 먹는 날이 없는 데다가 성품마저 거칠어 갔다. 어머니도 이젠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거니 하고 별다르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앙탈은 별천지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한 까슬까슬한 일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사람은 당하면 무엇이나 다해낼 수 있는 편리한 짐승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날도 돈주머니 속을 저울질 해보며 행인들의 지갑 속을 점쳐보고 있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지루한 줄도 몰랐다. 또 시간 가는 것이 아쉽지도 않았다. 헤아릴 필요가 있는 것은 주머니 속뿐이었다. 마치 역이름은 알려고도 않고, 주머니 속만 헤아리는 강생회(홍익회의 이전 명칭) 원의 하루처럼. 해가 서산을 넘자 어둠이 동산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냉기가 품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촛대에 불을 달렸다. 그리고는 또 밤을 뒤적였다. 지나가는 이들이 그림자처럼 흐릿했다. 갑자기 저편에서 흥얼대는 노랫가락 소리가 들려왔다.
  “만고강산~ 유람할제~”
  어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정꾼 셋이 어깨를 걸고 다가오고 있었다. 한가운데 아버지가 끼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쌍년아 걷어치워. 으? 이거 안 하면 금방 한명운이가 죽을 줄 아니.”
  아버지의 발길에 밤알들이 떼구루루 길바닥으로 굴렀다. 다른 주정꾼 둘이 아버지를 끌고 승강이를 했다. 행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머니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쳤다. 정말 지나다니는 축들은 구경거리에 기질이 있었다. 보통 때는 한 잎 낙엽처럼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기를 보아주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의 가슴은 이상한 마음으로 설렜다. 그것은 서러움과 통쾌라는 서로 다른 두 가닥이 한데 꼬아진 상태였다. 이토록 어떤 일에 의미를 준다는 것은 심한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야! 야!”
  아버지는 싸우다 말고 끌려가는 사람처럼 헛소리를 치며 둘과 함께 다리를 건넜다. 어머니는 병풍처럼 둘러선 사람들 앞에서 밤알과 또 화독 속의 벌건 불을 모두 끄고 얹고 툭툭 털며 일어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길바닥에 뒹구는 밤알들이 흩어진 내 책장들로 돋보였던 것이다. 밤알들을 주어 모으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사람들은 구경이 시시했다는 듯이 울타리를 헐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어머니도 도저히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보자 아버지는 트집을 잡았다.
  “노는 사람은 밥도 없니?”
  어머니는 풀썩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어머니를 걷어찼다. 애들이 모두 초상집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는 속으로 흐느꼈다. 아버지는 그래도 시원치 않은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릇처럼 술집으로 다시 가는 것이 뻔했다. 희미한 전등 아래서 다섯 사람이 저마다의 설움을 흐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제 힘에 겨운 짐을 지고 비척(悲慽)이고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더는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하던 대로 방문을 걷어차고 집을 나섰다. 골목을 나오면서 나는 두세 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집이라는 곳에 불 질러 버리라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등덜미에서 나는 것 같았다. 뚜렷한 저주가 내 가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턱대고 시내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에는 주먹만큼 한 돌만 몇 개 폐허처럼 굴러있었다. 나는 그곳에 잠깐 발을 붙였다. 그리고는 돌을 모두 차버렸다. 큰일이나 해치운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본정통(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던 번화가를 이르던 말)의 길바닥은 양편에서 나온 길 등불로 달빛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전축의 리듬에 발끝이 흥겨웠다. 열이레 달빛은 내가 방금 뛰쳐나온 그 집 언저리에도 소담스레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거리의 분위기에 쌓이자, 궁상맞은 세계와 관계를 끊고도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남이 허덕임까지 괴로워하면서 갇혀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제껏 쭉정이를 넣고 헛방아만 돌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매여 있기보다는 넓은 세계로 뛰쳐나와 마음껏 세상을 누벼보고 싶은 생각이 조그만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그래야 내 몫을 다 찾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빛도 그것이 옳다는 듯 아낌없이 은빛을 쏟고 있었다.
  이래서 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정말 미련없는 발길을 떼어 놓았다. 새로운 필름을 잔뜩 장만해서… [끝]


충북대학보 제30호(1963년 9월 20일자)부터
제33호(1964년 1월 10일자) 까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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