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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 최영은
노벨상(Nobel Prize) : 역대 수상자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제 884 호    발행일 : 2014.11.03 


지난달 10일 노벨평화상 수상자 명단이 발표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17세인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어떻게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처럼 매년 10월과 12월이 되면 전 세계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와 시상식으로 떠들썩해진다. 그렇다면 경제학.문학.물리학.생리의학.평화.화학상, 총 6개 분야로 이뤄져 있는 노벨상은 누가, 어떠한 이유로 수상하게 되는 것일까. 처음 노벨상이 시작됐던 1901년부터 이번 2014년 노벨상까지 각 분야별로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자.

  노벨상 중 수상여부와 상관없이 상 자체와 관련해 논란이 있는 부문이 있다. 바로 노벨경제학상이다.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주어지고 있지만 경제학상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당초에 노벨상은 경제학상을 제외한 5개 부문에서 주어졌는데 1961년부터 스웨덴의 중앙은행이 창립 300주년을 맞아 경제학상을 제정, 상금을 노벨재단에 기탁하는 조건으로 경제학상이 노벨상에 편입됐다.
  이러한 태생적 이유 외에도 경제학상에 대한 논란은 또 있다. 수상자 선정과 관련해서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대 수상자의 3분의 2가 미국인이고 남성이며 대부분 보수적 경제학자인 점 등 수상자의 편중성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하지만 201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서 이러한 논란은 조금 수그러들 것으로 보인다. 수상자는 프랑스 툴루즈 제1대학교 장 티롤 교수로 그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기존에 미국이 독식하던 노벨경제학상 구조에 새바람을 불러왔다는 평가다. 장 티롤 교수는 기업들의 역학과 규제방법에 관한 연구로 상을 수상했는데, 스웨덴 노벨상위원회는 “그는 소수의 강력한 기업이 힘을 행사하는 시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밝혔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고안한 ‘플랫폼 이론’의 핵심은 소수 대기업의 독과점에 대해 일괄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시장과 산업 특성에 따라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글, 페이스북 등 네트워크 산업에 속하는 기업들의 수익 구조를 가장 잘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글은 검색엔진 분야를 혼자 독식하다시피하고 있지만 정부가 마땅히 기업을 규제할 방법은 없다. 사용자가 구글을 이용하면서 지불하는 비용이 0원에 가깝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로는 규제할 방법이 없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장 티롤 교수의 플랫폼 이론은 네트워크 산업의 독과점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 티롤 교수는 “정부는 이런 네트워크 산업에 대해서는 시장 지배력 남용이나 담합.불공정 거래행위를 판단할 경우 일반 제조업과는 다른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며 “즉 독과점 기업에 대한 규제는 개별 산업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년 가을 무렵이면 노벨상 수상자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지만 올해는 더욱 화제를 몰고 온 수상자가 있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이야기다.
  2009년 11살의 말랄라 유사프자이(이하 말랄라)는 영국 BBC 방송 블로그에 하나의 글을 올렸다. 탈레반의 지배하에 있던 파키스탄 스와트 계곡 사람들의 비극적인 참상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말랄라는 여학교를 파괴하는 탈레반을 비판하고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과 평화를 호소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던 2012년, 말랄라는 탈레반 무장 세력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스쿨버스를 타는 과정에서 탈레반에 의해 머리와 목, 어깨에 3발의 총탄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총알이 머리를 뚫고 지나갈 만큼 심각했던 그 테러도 말랄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그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알려지며 그의 활동에 날개를 달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말랄라는 계속되는 탈레반의 살해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과 어린이의 교육권에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7월 12일, 자신의 16살 생일에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한 그는 “한 명의 어린이가, 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지난 7월에는 극단 이슬람 단체 보코하람에 납치된 200여 명의 나이지리아 여학생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미 지난해 노벨평화상 후보였던 그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수상 대상에서 아쉽게 제외됐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 좋은 때라고 판단한 노벨위원회는 201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말랄라를 선정하며 세계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그에게 걸어줬다. 말랄라는 기자회견에서 “이 상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라고 노벨위원회에서 주는 것 같다”며 “이를 시작으로 더 큰 노력을 기울일 테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퀴리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리 퀴리는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로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20세기 초반의 과학계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다.
  사실 그는 191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기 전 이미 190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1898년에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는 우라늄 광석에서 염화바륨이 소량 섞여있는 방사능 물질인 염화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게 된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 물질 폴로늄을 발견해 연구한 공적으로 190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노벨물리학상의 공적에 염화라듐의 발견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방사능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일부 심사위원이 물리학상의 공적에 ‘라듐’이라는 원소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리 퀴리는 혼자서 라듐을 분리하는 연구를 계속했고 1910년 순수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라듐은 질병, 특히 암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라듐은 오늘날 암 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방사성 치료의 시대를 열었고, 방사성 물질을 화학적으로 연구하는 방사화학의 새 분야를 열게 했다.
  마리 퀴리는 1911년에 라듐의 발견, 라듐의 분리, 라듐과 그 화합물의 특성 연구에 대한 공적으로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하며 인생에서 단 한 번 받기도 힘든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인 동시에 과학의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됐다.
  마리 퀴리의 1911년 노벨화학상 수상은 과학에서 양성 평등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힘겨운 과정을 극복한 뒤 중요한 연구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인류 복지에 활용한 참된 화학자의 자세와 정신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1901년부터 수여한 역대 수상자 가운데는 현대의학의 수준을 한층 올려놓은 수상자가 있는가 하면 지금으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수상자도 포함돼 있다.
  의미있는 수상자들 가운데 한 명은 1901년 최초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베링이다. 그는 당시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소아기 질병 ‘디프테리아’에 대한 효과적인 항혈청요법을 개발한 공로로 상을 수상했다. 항혈청요법은 디프테리아를 치료하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질병 치료법이란 것 외에도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치료법이 전무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의사들은 특정 질병을 위한 약을 처방하는 대신 몇 가지 백신들을 가지고 범용적으로 약을 처방했다. 하지만 베링의 성과는 이후 특정 질병에 특정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바탕이 됐고 그 결과 서양 의학이 세계에서 압도적 우위에 서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지난 2006년 노벨상 역사에서 오점을 남긴 몇몇 수상자들을 발표했다. 1926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피비거가 바로 이 불명예스러운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피비거의 경우 잘못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상한 특이한 사례다. 당시 그는 쥐에서 발견한 기생충 스파이롭테라(spiroptera)가 위암을 일으킨다는 실험적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훗날 이 연구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다.
  어떻게 노벨상이라는 권위 있는 상에서 이런 실수가 있었을까.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봤다. 1920년대 초반 새롭게 등장해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질병인 암에 대한 사회적 공포가 대단했던 것에 비해 암 발생의 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암에 대한 치료법이었고 암 연구에 대한 실질적인 검증보다는 암을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계속 커져만 갔다. 결국 대중들의 암 정복에 대한 부푼 기대는 잘못된 연구결과가 노벨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노벨상 114년의 역사에 오점 하나를 남기게 된 셈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를 진일보시킨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있었지만 그중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유럽국제문화연구소의 설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과학자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과연 노벨상을 받았을까. 정답을 먼저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상대성이론’이나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업적은 ‘광전효과’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상대성이론은 확인되지 않은 이론이었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던 터라 노벨상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노벨상 선정의 기준과 관련해, 전 노벨상 심사위원장인 보리 요한슨 웁살라대 교수가 국내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두 가지는 노벨의 유언에 충실했는가와 연구 성과가 얼마나 임팩트 있는가”라며 “노벨물리학상의 경우 학계 내 최고의 성과를 이룩한 연구자에게 주어진다”고 밝혔다. 보리 요한슨 교수의 인터뷰 내용이 과거의 선정기준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당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분명 임팩트는 있었지만 학계의 논란으로 인해 최고의 성과로 치부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6개의 노벨상 부문 중에서도 노벨문학상은 후보자도 발표일도 미리 공개되지 않아 노벨상 분야 중 가장 많은 호기심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노벨문학상은 작가 개인이나, 작가의 출신국가, 나아가 언어권에서 큰 영예로 받아들여지는 상이지만 노벨상 114년의 역사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수상을 거부하는 사건들도 존재해 주목해 볼만하다.
  먼저,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러시아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정치적 외압에 의해 수상이 좌절된 케이스다. 근대 러시아 제국에서 소련으로 변화하는 혁명기에 활동했던 파스테르나크는 당시의 사회상을 작품에 담았다는 이유로 소련 작가연맹의 견제에 시달렸다. 또한 그의 대표작인 <닥터 지바고>가 소련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국외로 추방될 위기에 놓였으나 “조국을 떠나는 것은 죽음과 같다”는 그의 탄원이 받아들여져 국외 강제 추방은 면했다. 이후 그는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외국 시를 번역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57년 <닥터 지바고>의 원고가 해외로 유출됐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책이 출간됐다. 1958년 <닥터 지바고>의 작품성을 인정한 노벨위원회에서는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정했다. 하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작가연맹의 외압과 정치적 탄압에 의해 수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노벨상 수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상을 거부했던 사건이다.
  반면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최초로 자진해서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인물이다.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이 인터뷰를 청하자 그 자리에서 노벨상 거부 의사를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을 수상 거부 이유로 밝혔다. 그는 “작가는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수단인 글을 통해서만 행동해야 하며, 어떠한 기관이나 제도에 편입돼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활동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이 제안 받은 교직이나 훈장 등을 거부해왔다.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에는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다. 바로 소설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관련된 내용이다. 카뮈는 1957년 당시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에 사르트르는 어린 나이에 일찍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보다 늦게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불만을 품고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카뮈와 라이벌 관계였던 사르트르였기에 이 뒷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김지하 기자 kjha0921@cbnu.ac.kr
최영은 기자 choyouneu@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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