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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9.07 월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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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준혁
우리 곁에 살아있는 충북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제 992 호    발행일 : 2026.03.09 
  올해는 3·1 운동 107주년을 맞는 해다. 1945년 광복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여전히 적지 않다. 제107주년 3·1절을 보내며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관련 사적지를 방문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려보았다.

잊히길 원했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 이상설

  중부고속도로 진천 IC 인근에는 현대식 한옥으로 지어진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이 있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4에 있는 이 기념관은 하절기(오전 9시~오후 6시)와 동절기(오전 9시~오후 5시)로 나누어 운영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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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설 선생의 생가.

  이상설 선생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한적한 농촌 풍경 속에 자리 잡은 이상설 선생의 생가를 먼저 찾았다. 흙벽에 볏짚으로 어영을 엮어 올린 나지막한 초가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헤이그 특사로 활약했던 선생의 명성에 비하면 지극히 소박한 모습이었다.
  생가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숭렬사가 나온다. 숭렬사는 지역 주민과 후손들이 이상설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사당 안쪽에는 선생의 청년 시절 영정이 모셔져 봉향을 받고 있었다. 이상설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잠시 묵념을 한 뒤 기념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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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위용을 드러낸다. 그 뒤편에는 선생 가족의 후원으로 조성된 임수명 선생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줄지어 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인 임수명 선생의 삶은 깊은 울림을 준다.
  경성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임수명 선생은 당시 일본 경찰에게 쫓기던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 선생을 만나 동지이자 반려자의 인연을 맺고, 국내에서 독립운동 관련 비밀 문건 전달과 군자금 조달을 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임수명 선생은 상심하여 자결로 남편 뒤를 따랐다. 현재, 임수명 선생은 진천에 있는 신팔균 선생 집안의 선산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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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근대적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가운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이상설 선생이 만든 최초의 근대적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가 눈에 띄었다. 두꺼운 종이 위로 정갈하게 써 내려간 수식과 한자들이 지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비록 한자로 적혀 있어 그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유리 쇼케이스 너머로 보이는 <산술신서>에 담긴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정성이 느껴졌다. 교육으로 조국의 기틀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선생의 강인한 의지가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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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설 선생의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

  전시 동선을 따라가다 보니, 은은한 황색 조명 아래 선명한 필치로 써 내려간 상소문 한 점이 발길을 잡았다. 이 상소에는 ‘죽음을 각오한 상소’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 수식어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상소에는 을사늑약을 막지 못한 고종의 하야를 요구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행간마다 서린 군주에 대한 매서운 질책과 목숨을 건 용기, 그리고 나라를 잃은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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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 특사에게 준 고종 황제의 칙서와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 기사.

  이후 선생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편견 되며 정사(正使, 특사의 대표)를 맡는다.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회의장 입장은 끝내 무산됐지만, 선생을 비롯한 특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회의장 밖에서 호소문을 발표하고, 각국 기자단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대한의 독립 의지를 피력했다. 전시된 당시 신문 속 특사들의 사진과 기록에는 그들의 비장함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 후 이상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하이 등 해외를 무대로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 데 평생을 바치다가 1917년 연해주에서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했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선생은 유언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한 죄책감에 자신의 모든 기록을 지우고 역사에서 잊히길 원했다. 유언에 따라 선생의 많은 활동 기록과 저술이 소실 되었고, 선생의 거대한 업적은 후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의 가슴 아픈 유언은 우리가 왜 선생의 발자취를 기려야 하는지 보여준다.

대를 이은 구국 정신, 정순만 선생 일가가 걸어온 독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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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에는 이름부터 숭고한 독립운동가마을이 있다. 이곳은 일가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검은 정순만 선생의 고향이자, 선생이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덕신학교의 터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겪은 선생이 교육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임을 통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문중 어른들을 설득해 세운 덕신학교의 외벽에는 선명하게 태극기가 있다. 내부는 생각보다 작고 소박하지만, 암흑 같은 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던 학생들, 그리고 기꺼이 교육 봉사에 나섰던 선구자들의 헌신은 좁은 교실 안을 가득 채우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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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만 선생이 문중 어른들을 설득해 세운 덕신학교.

  1873년 덕촌리 반곡마을에서 태어난 정순만 선생은 을미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항일 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선생은 독립협회 참여와 만민공동회 활동, 을사늑약 반대 투쟁 등을 전개하며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선생은 1906년 만주로 망명해 이상설 선생과 함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선생은 후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사상을 심어주는 데 전념했다. 또한 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이상설 선생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필요한 거액의 비용을 동포들로부터 모금해 전달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활동 무대를 연해주로 옮긴 선생은 한인 사회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발간을 주도하며 항일 언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의 배후로 지목됐던 ‘동의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의거 직후에는 안 의사의 구명을 위한 변호사 선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국내 진격을 위한 의병부대 창설을 준비하던 선생은 1911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정순만 선생의 아들 정양필 선생 역시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893년 덕촌리에서 태어난 정양필 선생은 1905년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의형제인 박용만 선생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에서 성장한 선생은 1909년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해 사관생도로서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1917년에는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농학사 학위를 취득한 재원이었다. 정양필 선생은 1919년 4월 서울에서 열린 한성임시정부 각원 선출 당시, 국민대표 25인에 의해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임되며 그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선생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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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만 선생 일가의 묘지.

  정양필 선생의 부인인 이화숙 선생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일찍이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적십자회와 대한애국부인회 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으며 조국 독립에 힘을 보탰다. 선생의 역량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인정받아,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임명됐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양필 선생과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선생은 상해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독립 자금을 지원했다.

  이번 기사를 통해 살펴본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근간이다. 특히 “자신의 흔적을 지워달라”던 이상설 선생의 가슴 아픈 유언은 명예보다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했던 선생의 진심이 느껴진다. 또한 한 개인을 넘어 온 가족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정순만 선생 일가의 행적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비록 기록이 사라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사적지를 방문하는 일이야말로 잊히길 바랐던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예우일 것이다. 107주년 3·1절을 보내며,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는 충북의 독립 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본다.


손준혁 기자 
sonjunhyeog123@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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