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 오후, 마트는 다가올 일주일을 책임질 식재료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카트에 쇼핑 품목을 모두 담았다면 이제부터는 눈치싸움 시작. 카트가 꼬리를 물고 선 일반 계산대를 지나 조금은 한적한 무인 계산대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느 날은 조립식 가구를 주문해 조립을 시도한다. 작은 책상이라서 “이 정도야 쉽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조립하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건 “돈 주고 완성품 사는 게 편하다”는 결론. 하지만 다음에도 돈 때문에 조립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한편, 공항에는 탑승 수속을 담당하는 키오스크부터 수하물 위탁을 승객이 직접 처리하는 키오스크까지 등장했다. 키오스크를 통해 승객 흐름 속도를 높이고, 공항 전체에서 더 빠르고 효율적인 수속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과 돈 대신 ‘셀프’로 일컬어지는 나의 노동력을 선택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든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많은 노동을 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익숙해졌기에 우리는 노동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림자 노동이란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빈일리치가 자신의 저서에서 ‘그림자 노동’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했다. 기술 발달로 무인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기업이 해야 할 주문의 접수, 결제와 같은 노동이 소비자에게 ‘무급 노동’으로 전가됐다는 것을 빗대어 그림자 노동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고객들이 “내 일이 아닌데 내가 무급으로 노동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개념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발견되며 현대사회에서는 회사가 직원에게, 기업이 소비자에게, 기술이 사람에게 그림자 노동을 전가한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단어를 상상하면 사람들은 대개 무인 계산대 또는 조립식 가구 정도를 떠올릴 테지만 스팸 메일 분류와 삭제, 공인인증서 발급과 갱신, 전화 상담원과의 통화 대기 등 자잘한 일 모두 그림자 노동에 포함된다. 세밀하게 따져보면 우리는 아주 많은 노동을 하는 중이다. 이처럼 그림자 노동은 우리 사회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노동자의 대표적 그림자 노동은 통근으로 고용주에게 이익이 되는 무급 노동이다. 통근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에게 전가되는 부담이 크다. 노동자는 통근을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차를 사서 보험을 들고, 기름까지 넣어 가며 관리를 하고 직접 운전도 한다. 소비자의 그림자 노동은 더 흔하다. 커피숍에서 주문한 음료를 직접 픽업대에서 가져오고, 다 마신 후에는 컵을 스스로 치우는 것은 소비자가 담당해야 하는 무급 노동으로, 점점 더 많은 업종에서 이를 강요하고 있다. 가정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가사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고 그 가치가 지워진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달은 그림자 노동을 더욱 증가시켰다. 현대인이 관리해야 하는 디지털 정보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일정 주기마다 변경해야 하는 패스워드는 점점 더 길어지고 특수 문자까지 포함해야 하는 등 복잡해져 관리가 까다로워지고 있다. 또한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가 사용자들이 작성하는 경험담, 후기, 자기주장에 의지한다.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큰 이득이 발생하는 것도 아닌데, 정성 들여 장문의 후기를 작성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성심껏 답변한다.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동력은 사용자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그림자 노동이다.

우린 왜 그림자 노동을 받아들이나
이처럼 수많은 그림자 노동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비자에게 맡겨지는 그림자 노동’이다. 소비자의 그림자 노동은 단순히 불편을 감수하는 문제를 넘어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그림자 노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선호한다.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비대면이 일상화하면서 비대면 거래 선호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한국소비자원이 2022년 11월 발표한 <키오스크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20대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0명 중 6명(57.6%)이 직원에게 직접 주문하는 대면 거래보다 키오스크를 이용한 비대면 거래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비대면 선호도는 연령이 낮을수록 더 높았는데 20대 75%, 30~40대는 60%였다. 이처럼 젊은 세대가 비대면 거래를 선호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낯가림과 불편함 때문이다. 40대 직장인 이지현(청주시 서원구) 씨는 “사람에게 직접 요구사항을 말하는 것보다 기계를 통해서 하는 게 훨씬 편하다”라고 말했다. 또 20대 박유나(청주시 청원구) 씨는 “나는 전화 공포증을 겪을 정도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무인 시스템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진다”라고 전했다.
키오스크를 이용한 비대면 거래처럼 어쩔 수 없는 환경이 아닌데도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그림자 노동을 선택하고 즐기는 경우도 있다. 바로 ‘DIY(Do It Yourself)’ 제품이다. DIY는 소비자가 스스로 생산 과정에 참여해 자신만의 제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최근에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 튜닝이나 가구 조립 등의 DIY는 단순히 비용 절감의 차원을 넘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결과물을 창출하는 취미로 여겨진다. DIY를 즐기는 이들은 이러한 노동 과정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큰 만족을 얻는다. 한편, DIY는 그림자 노동으로 분류하지 않기도 한다. 항공사의 온라인 체크인이나 대형마트의 무인 계산대처럼 소비자가 기업의 프로세스에 어쩔 수 없이 동참한 그림자 노동은 ‘불필요한 노동’, ‘기업이 나에게 전가한 노동’으로 인식하지만, DIY는 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한 노동으로, 그 과정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그림자 노동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를 충남대 경제학과 윤자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그림자 노동을 빠르게 수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끼는 한국인의 성향은 ‘셀프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소비자 역할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본인의 일은 본인이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그림자 노동은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한국 사회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그림자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셀프서비스의 도입은 소비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시간 절약의 장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대형 패스트푸드점에서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하는 고객은 직접 메뉴를 선택하고 결제까지 끝마치는데, 이는 유인 계산대에서 주문하는 것 보다 주문 시간과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셋째,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이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집단 내에서 조화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크다는 의미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셀프서비스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은 그림자 노동으로 소비자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존재한다. 소비자가 그림자 노동을 수용하는 이유에는 경제적 요인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셀프 주유소는 일반 주유소보다 저렴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소비자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비용을 절감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림자 노동을 받아들인다.

그림자 노동, 그 이면에 감춰진 것들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는 자신의 저서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서 “그림자 노동은 아주 매력적인 방식으로 기업에 보상을 안겨준다. 돈도 받지 않고 일해 주는 고객들에게 짐을 떠넘기면서 그만큼 엄청난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할 자본가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그림자 노동은 고객에게 제공하던 서비스를 일정 부분 고객 스스로 처리하도록 유도해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는 기업의 전략이다. 물론 자신만의 특색을 담을 수 있고, 직접 행사하는 재미를 제공한다는 마케팅 전략으로 적절히 포장하면서 말이다.
윤자영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자 노동으로 인해 소비자는 과거보다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많은 경우, 기업들은 그림자 노동을 통해 절감된 비용을 소비자에게 할인 혜택으로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림자 노동을 선택해야만 가격 할인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과연 모든 소비자에게 공평할까? 소비자라면 스스로 계산을 처리하거나, 주유소에서 직접 주유하는 간단한 업무를 수행한 대가로 받는 할인 혜택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택지가 모든 소비자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무인 계산대나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노인이나 신체적 불편을 겪는 사람은 가격 할인 혜택을 위한 그림자 노동에 참여할 수 없어 건강한 소비자에 비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윤자영 교수는 소비자에게 그림자 노동이 강제되면 소비자의 시간 중 일부는 이제 더 이상 여가가 아니라 노동의 일부가 된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여가 활동이나 휴식으로 채워졌던 시간이 이제는 기업의 비용 절감을 위한 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그림자 노동은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노동이 아닌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시간적 손실에 대한 보상은 없다. 소비자는 자신의 시간을 들여 노동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원래 제공받아야 할 기본적인 서비스에 불과하다. 그림자 노동이 점차 강제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자신의 여가 시간을 보존할 권리를 잃어가고 있다. 기업의 효율성 추구가 소비자의 시간과 여가를 잠식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는 결국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안기고, 소비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킬 것이다. 따라서 기업은 그림자 노동을 강제하기보다는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소비자의 시간은 결코 기업의 비용 절감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 없는 소중한 자원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셀프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강제되는 노동을 자각해야 한다. 기계화와 자동화에 대한 경계심만큼이나 우리 일상에서 자행되는 그림자 노동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그것이 우리의 권리와 여가 시간을 잠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셀프서비스는 기업이 부담해야 할 노동을 은밀히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내가 지금 하는 노동이 당연하다고 고분고분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더 큰 그림자 노동으로 기업에 봉사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은 더 나은 소비자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 셀프계산대 도입 반대 현수막.
장윤서 기자
younseojang@chungbuk.ac.kr








장윤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