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대로 피카소의 <인생>, <우는 여인>, <아비뇽의 처녀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양화가로 미술에 대해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에서 ‘루이스’, 어머니의 이름 ‘마리아 피카소 로페소’에서 ‘피카소’를 따와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파블로 피카소(이하 피카소)라고도 불리고 있다.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4월 8일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93년의 세월 동안 <우는 여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같은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피카소. 그와 미술의 인연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14세가 되던 1895년에 아버지 호세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라론하 미술학교로 발령받아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가면서 피카소도 라론하 미술학교에 입학해 정식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재입학했지만 마찬가지였고 그는 얼마가지 않아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 당시 바르셀로나는 프랑스와 문화교류가 활발해 프랑스 문화가 많이 전파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에 대해 호의적이였던 피카소는 1900년,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파리를 여행하면서 프랑스 문화에 더욱 더 매료됐다. 루브르 미술관, 뤽상부르 미술관 등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인상주의·신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여러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미술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이때부터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미술사는 어떠했을까?
피카소가 말라가를 떠나 파리로 향했던 1901년부터 파리에 정착하던 시기인 1904년까지를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는 그 당시 피카소가 청색 위주의 그림을 그려 생긴 이름이다. 그가 "나의 청색 시대는 카사헤마스의 죽음과 함께 왔다"고 말했듯이 단짝이었던 친구의 죽음은 그가 청색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다. 카사헤마스가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자살로 목숨을 잃자 큰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청색을 통해 슬픔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작품은 <인생>이다. <인생>은 청색시대에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큰 그림으로 작품에 그려진 남자는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여자는 그의 연인인 로르 가르갈로로 육체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망토를 입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이며 정신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 피카소는 청색시대를 지나 시간이 흘러 입체파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그는 20세기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던 입체파의 창시자이다. 입체파는 폴 세잔(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 화가)의 영향이 피카소에게 전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잔은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잔의 작품세계는 피카소에게 전해졌다. 피카소 이전의 많은 화가들은 대상을 하나의 시점에서 관찰하여 그렸지만 피카소는 하나의 시점이 아닌 전후좌우에서 대상을 관찰해 작품을 표현했다. 입체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는 여인>, <아비뇽의 처녀들> 등이 있다. <우는 여인>은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작품은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 재조립해 그린 피카소만의 색깔이 나타난 그림이다. 또한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의 도시 아비뇽 인근 사창가 여성을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피카소는 이처럼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고 지금까지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홍지희 기자
hjh38124@cbnu.ac.kr
차례대로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의 초상>, <붉은 화실>, <춤2>
20세기 가장 유명한 미술가인 ‘피카소’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20세기 미술계를 빛냈던 그의 라이벌은 누구일까? 바로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이하 마티스)’라는 프랑스 출신의 화가이다. 마티스는 피카소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에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위대한 미술가다.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르 사토 캉브레시에서 태어나 1954년 11월 3일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피카소와 달리 처음부터 미술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법률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무심코 물감상자에 그려진 그림을 따라 그리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미술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모로(프랑스 화가로 마티스를 비롯해 20세기 미술의 대가 여럿을 육성했다)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18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독서하는 여인>을 출품하면서 차차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마티스는 드랭(프랑스 화가로 처음엔 야수파 성향을 보였으나 후에 입체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과 만났고 그의 소개로 블라맹크(프랑스 화가로 야수파 화가들 중 가장 맹렬한 작품을 선보였다)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만남이 바로 야수파의 시발점이 된다. 마티스는 그렇게 점점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해가며 야수파의 대표 화가로서 명성을 떨친다. 그러다 그는 72세가 되던 해, 암 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요양을 위해 프랑스 니스에 위치한 방스라는 동네에 정착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지막 작품 활동을 펼친다. 특히 방스에 위치한 ‘로자리오 성당’은 그가 건축 설계부터 벽화,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모두 자신의 구상대로 건축해 마티스의 모든 것이 담긴 곳이다. 그는 성당을 설계할 때 “이것은 생애 최고의 작업이며, 거대하고 신성하며 힘겨운 노력이 꽃피우는 과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1954년 마티스는 이 성당을 마지막으로 미술가의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마티스가 추구하고 선동했던 야수파는 어떤 미술일까? 야수파는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인상파(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색채, 색조, 질감에 관심을 두며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유명한 화가로 모네, 고흐, 고갱 등이 있다)나 신인상파의 화법에 반기를 든 운동이다. 야수파의 작품에서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대담한 화풍이 드러난다.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하며 명암·양감 등도 파기했다. 작품을 자기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점과 더불어 색과 형을 자유롭게 창조해 개성을 더한 점이 20세기 최초 예술적 혁명이다.
이 야수파의 대표적 화가였던 마티스의 작품으로는 <마티스 부인의 초상>, <붉은 화실> ,<춤 2> 등이 있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은 작품명 그대로 자신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강렬한 색채가 눈에 띄는 이 작품은 대표적인 야수파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붉은 화실> 은 마티스의 가장 섬세한 작품 중 하나다. 벽과 바닥을 붉은 색으로 칠해 언뜻 봐선 구분이 어려운 점이 미묘한 느낌을 준다. 또 하나의 재밌는 점은 작품 속 화실의 벽에 그의 그림과 조각 작품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춤 2>는 빨강, 파랑, 초록의 단순한 원색 색채로만 그려졌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의 강렬함과 생동감이 더 느껴진다. 특히 맨 왼쪽의 남녀가 손을 잡을 듯 말 듯 하고 있는 모습은 맞잡은 손보다 더 야릇한 긴장감을 준다는 해설도 있다.
이처럼 마티스는 처음부터 미술가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20세기 당대 최고의 미술가라 칭해지는 피카소와 라이벌을 이루며 야수파라는 미술운동을 이끈 장본인이었다.
류도연 기자
tjdwls9933@cbnu.ac.kr








홍지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