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부터 경쟁 부문에 진출한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까지, 한국 영화는 세계적 무대에서 이례적인 역사를 쓰고 있다. 개봉한 <호프>는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이는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에 얼마나 깊이 몰입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수많은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드는 이 감정의 울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기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향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특수법인으로 고전 한국 영화 필름과 영상자료를 수집.복원.보존하는 공공기관이다. ‘영상자료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국민의 영상 아카이브’라는 비전 아래, 한국 영화의 역사를 지키는 현장을 직접 확인해 보았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으로 가기 위해 공항철도를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 9번 출구로 나와 15분 남짓 걸었다. 걷다 보니 MBC와 YTN 등 방송에서만 보던 방송국들이 한데 모여있어 신기했다. 연예인들의 핸드프린팅이 새겨진 ‘스타의 거리’도 소소한 볼거리를 더했다. 우리 학교가 있는 청주와는 사뭇 다른 도시 풍경에 빠져들 때쯤, 마침내 목적지인 한국영상자료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층 한국영화박물관 - 상설 전시

▲ <괴물>에서 배우 송강호와 배두나가 입었던 의상.
1층에는 한국영화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은 상설 전시실, 오른쪽은 기획 전시실이다. 기획 전시를 관람하기 전, 한국 영화의 흐름과 역사를 먼저 파악하고자 상설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벽면 패널을 살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등 대중에게 친숙한 명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익히 접했던 작품들이라 자연스레 흥미가 생겼다.
상설 전시는 한국 영화사를 14개 세부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웰메이드 영화의 시대’ 섹션이다. 바로 직전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인 1960년대와 쇠퇴.불황을 다룬 1970년대의 고전 영화들을 조명한 섹션이었다. 생소한 고전 영화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오래된 영사기가 가득한 풍경은 다소 거리감이 느껴져 깊이 몰입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인지 생소했던 시대를 지나 맞이한 ‘웰메이드 영화의 시대’ 섹션은 한층 더 반갑게 다가왔다.
섹션의 설명을 읽고 시선을 옮기자 <공동경비구역 JSA>, <괴물>, <기생충> 속 주인공들이 입었던 실제 의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기자가 극장에서 관람했던 <기생충>의 의상 앞에서는 영화 속 비를 뚫고 터널을 지나던 장면과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까지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어 <괴물>의 의상을 마주했을 때는 평화롭던 한강 변에 괴물이 출몰해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던 압도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전시된 의상을 보면서 작품 전체를 다시 떠올리는 경험은, ‘웰메이드 영화’의 완성도가 주는 특별함이었다.

흥행작들의 소품을 둘러본 후, 영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양옆으로 마련된 미디어 테이블에서 <밀양>, <마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 대표적인 한국 영화의 OST를 들을 수 있다. 화면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LP판 연출은 마치 골목길 음반 가게에 들어선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평소 스마트폰으로 자주 듣던 영화 OST였지만, 현장에 마련된 대형 스피커와 고성능 헤드셋으로 접한 울림은 색달랐다. 모바일 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웅장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특히 평소에 자주 듣는 <올드보이>의 OST ‘The Last Waltz’를 대형 스피커와 고성능 헤드셋으로 접하니 울림이 전혀 달랐다. 핸드폰의 작은 스피커 속에 묻혔던 묵직한 저음이 깊게 깔리며, 특유의 애절하고 웅장한 악기의 선율이 공간 전체를 밀도 높게 채웠다. 늘 듣던 친숙한 음악이었지만 이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선율의 결이 살아나 전혀 새로운 곡처럼 다가왔다.
영화 음악을 들어볼 수 있는 체험 외에도 바로 앞에 설치된 다른 미디어 테이블에서는 주요 영화의 감독과 배우 정보를 검색하는 기능도 제공하고 있었다. 청각적 몰입과 시각적 탐색을 한 자리에서 두루 경험할 수 있어 전시의 몰입감이 한층 깊어졌다.
1층 한국영화박물관 - 기획전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전시실에서는 “제목전(展) – 텍스트, 타이포그래피, 무빙 이미지”가 열리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영화 8,436편의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를 빈도순으로 100위까지 추출해, 한국 영화가 어떤 정서와 서사에 기대어 지난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를 조명한다. 단순히 영화 제목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인물과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의 궤적을 깊이 있게 분석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영화를 즐겨 보면서도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흰 벽을 가득 메운 화려한 타이포그래피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전시장의 수많은 문장 중 나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멈춰 세운 곳은 단연 ‘돌아오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섹션이었다. 사실 평소 폭력적인 장면이 가득한 액션 영화나 이른바 ‘다찌마리’(과장된 연출과 유쾌한 B급 감성의 고전 액션 장르)를 그리 즐겨 보지 않았다. 화면을 채우는 거친 자극과 폭력성은 거부감을 주었고, 인물들이 왜 그렇게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연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했다. 어쩌면 거리에서 마주친 불량스러운 건달이나 폭력적인 사람의 내면을 궁금해하기보다 위험하니 빨리 피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랬던 나의 고정관념을 전시가 조명한 ‘돌아온’이라는 단어 하나가 일순간에 깨뜨렸다. <돌아온 왼손잡이>, <돌아온 팔도사나이>, <돌아온 외다리> 등의 영화 제목에 반복적으로 쓰인 ‘돌아온’이라는 말 뒤에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풍파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내야 했던 인물들의 고단한 삶이 숨어 있었다. 거친 폭력과 불량함으로 무장한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비정한 세상에서 제 몸 하나와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거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생존 방식이었던 셈이다.
단순히 거친 액션물로만 치부했던 영화들이 ‘제목’이라는 렌즈를 거치자,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거친 표면 뒤에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인물들의 이면과 숨겨진 사연을 포착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번 전시가 타이포그래피와 언어를 통해 선사하는 가장 직관적인 메시지였다.
2층 영상도서관

1층에서 전시를 둘러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영상도서관으로 이동했다. 입구 앞에는 방문객들이 가방과 짐을 편하게 맡길 수 있는 물품 보관함이 마련돼 있었다. 관람객이 영화 서적과 DVD를 부담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가 인상 깊었다. 복도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세미나실과 멀티미디어실, 그리고 이용객을 위한 정수기 등 편의시설이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영화 관련 서적들이 서가를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일반 도서관에서는 접하기 힘든 국내외 전문 학술지와 희귀 영화 서적,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의 필모그래피를 다룬 도서들이 갖춰져 있어 영화 전문 도서관다운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영상도서관의 핵심 이용 요소인 DVD 감상 방법은 매우 간편했다. 자료검색대에 이용 안내 과정이 친절하게 안내돼 있어 초행길인 방문객도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일반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방식과 유사하다.
① 자료검색대 PC에서 보고 싶은 영화 제목이나 감독 이름을 검색한다.
② 출력된 청구기호(배가번호)를 확인한다.
③ 청구기호를 들고 안내 데스크에 제출하면 직원이 해당 DVD를 찾아 준다.
④ DVD를 받고 비어 있는 좌석에 가서 시청한다.
평일 방문이었음에도 제법 많은 이용객이 찾아와 빈 좌석이 하나밖에 없었다. 토요일에 방문할 계획이라면 조금 서둘러 찾기를 권한다. 지정 좌석에도 DVD 시청 방법이 자세히 적힌 안내문이 붙어있어 처음 방문한 이용자도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이용객들이 저마다의 영화에 깊이 몰입해 있는 도서관 내부는 정숙하고 평온했다. 평소 집에서 홀로 OTT 콘텐츠를 즐길 때 느꼈던 특유의 적적함과 달리,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적막을 공유하며 각자의 작품에 몰입하는 경험은 색다른 환기이자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날 기자가 고른 작품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피크닉>이었다. 지난해 재개봉 당시, 청주 지역에서는 개봉관이 없어 관람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곳에서 달랠 수 있었다. 영상도서관에는 상영관이 적어 아깝게 놓쳤거나 OTT 플랫폼에서도 찾기 힘든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지역적 한계나 스트리밍 서비스의 부재로 관람하기 힘든 영화를 무료로 대여해 관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누리는 경로를 한층 넓혀준다.
평소 관객으로서 영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머물렀다면, 이번 방문은 스크린 뒤에서 영화를 만들고 지켜온 창작자들의 궤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체감할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 일반 도서관에서 접하기 힘든 전문 영화 도서와 명작들을 부담 없이 무료로 탐색할 수 있다는 점은 한국영상자료원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영화를 감상하며 느끼는 감정 그 너머의 이야기와 깊은 지식을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한국영상자료원의 방문을 추천한다.
박예원 기자
2023009028@cbnu.ac.kr








박예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