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한 디저트 카페는 독특한 인테리어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불구불한 글씨에 배색 테두리로 입체감을 살리고, 왕관과 해골 등 귀여운 그림들로 공백을 메운 벽의 색다른 모습에 손님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길거리에서 단순한 낙서로 치부 받던 그래피티가 실내 인테리어로도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뉴욕 브롱크스 거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반항적 청소년들과 소수 민족들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이름을 쓰고 기호를 그리며, 지하철과 벽 등 공개적인 장소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초반에는 이러한 행위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지만 현재는 예술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림은 우리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라고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이자 한국 근현대 미술의 산 증인인 김병기 화백은 말한다.
교회의 힘이 막강하던 시대에는 로마네스크 미술이 성행했고, 카메라의 발명으로 그림이 위축되던 시대에는 인상주의 미술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현대 미술은 어떨까? 현대에는 개성이 중시되면서 다른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자유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래피티도 현시대를 대변하는 미술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사전에는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으로 정의됐지만, 여느 현대 미술과 같이 그 범주를 규정짓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길거리 미술로 한정됐던 그래피티가 디지털 미디어와 갤러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디지털과의 신선한 만남
뉴욕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그래피티 아티스트 김환수 작가는 그래피티를 디지털로 표현해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주로 지하철에서 스케치를 하는데, 그 결과물을 컴퓨터로 옮겨 채색하고 배경을 넣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는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개인적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싶었다”며 “그래피티를 시작할 때부터 나다운 그림을 만들어 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에 접목시킨 그래피티는 실제로 나타내기 어려운 색을 표현하기에 용이하고, 그림을 소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실내에서 접하기 힘든 기존 그래피티의 성격을 깨고, 프린트된 작품을 전시할 수도 있다. 이를 입증하듯 김환수 작가는 지난달 뉴욕 뉴 스튜디오에서 작품전을 개최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과연 외국에만 존재할까? 우리나라에도 갤러리로 들어간 그래피티를 볼 수 있는지 취재해봤다.
거리의 예술, 갤러리로 들어가다
서울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오는 26일까지 <위대한 낙서>전 개최를 통해 그래피티 작가 7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 전시회는 그래피티를 소개하고 그래피티가 스튜디오라는 환경에 얼마나 안착됐는지를 관객에게 선보이고자 준비됐다.
전시회에서는 갤러리 세계로 스며든 대표적인 그래피티 작가 라틀라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는실험적인 재료로 그래피티 역사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의 작품 ‘Woodone’은 글자가 형태로 여겨지고 형태가 글자로 보이는 서예적 추상에 도달한 작품 중 하나다. 특히 나무 상자를 떼서 작업하는 등 쓰임 있는 도구를 예술의 캔버스로 재발견한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작가 닉 워커는 원하는 모양을 종이에서 오려 낸 후 그 구멍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찍어 내는 기법인 ‘스텐실’을 사용한 작가로 유명하다. 몸은 미키마우스고 머리는 권총인 그의 작품 ‘Micky Pistols'에서 캐릭터를 이용해 유머러스함을 추구한 그의 독창성도 엿볼 수 있다.
전시회를 관람한 김태완(서울시 용산구·22) 씨는 “평소 그래피티에 관심이 많았지만 모르던 작가들이 많았다”며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어 재밌었다”고 밝혔다.
그림으로 세상에 외치다
위와 같이 그래피티엔 예술적인 측면을 담은 작품도 많지만, 사회 문제를 풍자하는 그림도 있다. 초기 그래피티는 인종차별 비판에 뿌리를 두고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했고, 지금은 그 범위가 넓어져 각종 사회 문제까지 강렬하게 꼬집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쉐퍼드 페어리 작가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전쟁과 폭력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선전 미술이 대중에게 미친 파급적인 영향력에 감명 받은 그는 그 영향력을 빌려와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특히 그의 작품 중 ‘Peace And Justice Women’은 색감과 구도 면에서 사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느낌을 풍긴다. 하지만 그림 속 여자는 반전마크를 가리키고 있어 이 작품이 평화를 희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상업주의,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번 <위대한 낙서>전에 참가한 제우스 작가의 작품들은 유명 브랜드들의 로고를 물감으로 그리고 그 로고들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는 ‘리퀴데이션’ 기법을 썼다. 이를 통해 그는 소비 사회에 잠식돼가는 현대인들을 표현했다.
해외 작가들뿐만 아니라 국내 작가들 역시 그래피티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2015년 11월, 대구 지하철 반월당역 인근 벽과 박근혜 대통령 생가 터 안내판 등 5곳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과 닭을 합성한 그래피티가 그려졌다. 이와 같은 시기 서울 명동 거리에는 ‘ㅈㅂㅇㄱㅎㅎ 나라꼴이 엉망이다’라는 그래피티가 새겨지기도 했다. 역시 같은 시기 홍승희 예술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국정교과서 풍자 그림과 ‘사요나라 박근혜’라는 풍자화를 그려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풍자화는 욱일기를 배경으로 박 대통령이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 아래 ‘사요나라 2015.11.14’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더욱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그래피티 아티스트 김환수 작가는 “초기 저항적인 성격 때문에 그래피티가 사회를 비판하는 도구로도 사용되는 것 같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쉬워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좋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인가 불법인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래피티는 점차 발전해나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래피티는 불법과 합법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여 있다.
2013년 11월 18일 무궁화호 객차 등에 대형 그래피티가 그려져 경찰이 수사를 착수한 사건이 있었다. 또한 작년 10월 16일 대구 지하철 전동차에 붉은색과 검은색, 하늘색 스프레이로 ‘ONAS’ 등 알파벳을 새긴 그래피티가 발견돼 외국인 용의자 2명이 수사를 받았다.
공공기물에 그리는 그래피티는 허가받지 않는 이상 현행법상 ‘공동재물손괴죄’와 ‘공동건조물침입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고 예술 활동을 억압한다는 여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그래피티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을수록 억압이 더 심해진다는 지적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 그래피티를 그린 홍승희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공사장 임시 벽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재물손괴죄가 적용된 것이다. 이 사건은 공사장 임시 벽에 있던 수많은 그림들 중 유독 홍승희 씨의 그림만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재판 결과 재물손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검찰에 대한 대중의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피티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그래피티의 고장 미국에서도 비슷한 문제에 대해 고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직 그래피티가 가야 할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범민 작가는 “불법적인 그래피티에 대한 규제는 필요하겠지만 그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며 “그래피티 작가들도 만족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하루빨리 찾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얼마 전 한국 그래피티의 성지인 압구정 토끼굴에서 그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실질적으로 불가한 그래피티 단속을 포기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시간대만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해 화제가 된 것이다. 그래피티 작가와 정부 모두 만족할 수 있었던 이 사건을 계기로, 합법적으로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김노을 기자
doce26@cbnu.ac.kr
유민지 기자
nice9710@cbnu.ac.kr








김노을 & 유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