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소비로 표현하는 ‘가치소비’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를 중심으로 확산하면서 비건 문화도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다. 비건을 그저 ‘소수’의 ‘특이’한 사람들로 취급하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 당당한 주류문화로 발돋움하고 있는 ‘비건’에 대해 알아보고, 채식주의자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딥(Deep)한 비건에서 힙(Hip)한 비건으로

  국제채식인연맹(IVU)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 세계 채식 인구는 1억 8,000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 영국의 시사주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2019년을 ‘비건(vegan)의 해’로 지정하기도 했다. 채식 인구 증가는 국내도 마찬가지다. 한국채식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채식 인구는 약 15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2008년 비건 인구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약 10배 가량 증가한 수치다.
  이처럼 비건의 인구가 증가하고 비건 시장 또한 성장함에 따라, ‘비거니즘’이나 ‘비거노믹스’ 등의 신조어도 생겨났다. 먼저 ‘비거니즘’이란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식습관과 가죽, 동물의 털을 이용한 의류와 동물성 성분이 들어간 화장품 등을 피하는 소비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비거노믹스란 비건(vegan)과 경제(economics)를 합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비건 산업 전반을 의미하는 단어로 최근 다양한 산업에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컨설팅업체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비건 시장 규모는 매해 평균 9.6%씩 성장해 2025년에는 240억 600만 달러까지 확장될 것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비건 인구를 사로잡기 위한 기업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작년 나스닥에 상장한 미국의 식물성 고기 제조업체로 대표적인 ‘비욘드미트(Beyond Meat)’의 주가는 현재에도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동원 F&B ▲롯데푸드 ▲풀무원 등 국내 유수한 식품 업체도 비건을 위한 대체육 상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비건 타깃 식품인 대체육 이외에도, 오뚜기는 식물성 재료만을 이용한 라면 ‘채황’과 ‘그린가든’ 볶음밥 시리즈를 출시한 바 있다.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 ‘나뚜루’도 지난 5월 국내 최초 비건 인증 아이스크림을 출시했으며, 이는 두 달 만에 누적 판매량 7만 개를 돌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식품업체뿐만 아니라 유통업체도 변화하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 8월부터 전국 21개 매장을 시작으로 매장 내에 ‘채식주의존’을 마련했다. 국내 최대 배달음식 플랫폼인 배달의 민족도 지난 8월 말부터 서울 일부 지역구 6곳을 대상으로 어플 내 채식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먹는 비건을 넘어 ‘쓰는’ 비건으로

  한편, 나날히 발전을 거듭해나가고 있는 건 비건 ‘식품’ 분야뿐만이 아니다. 패션이나 뷰티 등 다른 분야에서도 비거노믹스는 그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먼저 뷰티 시장에서는 비건 화장품만을 출시하는 비건 전문 코스메틱 브랜드가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동물실험 지양은 물론, 전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에 동물성 원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식물성 재료로만 제조해 판매하는 것이 특징이며, ▲디어달리아 ▲멜릭서 ▲온도(owndo) ▲허블룸(Herbloom) 등이 대표적이다. 허블룸의 전혜진 대표는 “비건 산업은 식품 산업뿐만 아니라 패션이나 뷰티 산업에서도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시장을 보면, 비건 시장은 유기농 시장을 능가할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이는 환경과 동물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면서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최근에는 자사 제품을 구매한 고객 중 한 분에게 ‘비건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당장 먹는 것부터 실천하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바르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쉬운 것부터 동물 보호,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라며 비건 산업 종사자로서의 바람을 전했다.

  한편, 패션 시장에서는 지난 2017년, ▲구찌 ▲버버리 ▲베르사체 ▲아르마니 등의 해외 명품 브랜드가 전 생산 제품에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퍼 프리 선언을 발표해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또 다른 명품 브랜드인 프라다도 올해 2020 봄여름 여성복 컬렉션부터 퍼 프리에 동참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퍼 프리 선언’은 국내 패션 업계에도 이어졌다. 신세계 인터내셔널은 지난 8월 오리털이나 거위털 대신 신소재인 ‘플룸테크’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비건 패딩 브랜드 ‘세이브더덕’의 국내 판권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롯데홈쇼핑 자체 브랜드 LBL도 지난해  비건 패션 제품 ‘하이 FAUX 롱 무스탕’을 출시한 바 있다. 이외에도 ▲낫아워스 ▲비건타이거 ▲오르바이스텔라 ▲코르코 등의 신생 국내 비건 패션 브랜드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채식비건협회 회원사이자 동물 가죽 대신 식물성 소재인 코르크 가죽으로 제품을 개발 및 판매 중인 브랜드 코르코의 이성민 대표는 “지속가능한 패션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패션업계도 동물 가죽 사용을 지양하고 있으며, 대안 소재도 많이 나오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 패션업계의 윤리적 소비 형태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논(Non)비건이 만난 비건

  이처럼 소수의 문화를 넘어 다수의 일상이자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는 비건. 그렇다면, 실제로 ‘비건’을 지향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떨까. 현재 채식주의 라이프를 꾸려가고 있는 *비덩주의 *플렉시테리언 김보미(횡성시 둔내면.26) 씨와 비건 이수연(여수시 동문동.27) 씨의 이야기로 기사를 마친다.

*비덩주의 : 덩어리 고기를 먹지 않지만, 육수나 기타 부재료에 들어가는 고기는 허용하는 채식 지향 방식으로 국물 요리 때문에 채식이 어려운 한국의 채식주의자들이 탄생시켰다.
*플렉시테리언 : 비건 채식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육식도 허용하는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말.

Q. 비건을 지향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는지.

보미 : 외국에서 5년 정도 지냈었는데, 그때 만난 현지 친구들 중에 비건이나 베지터리안이 꽤 많았어서 ‘채식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거나 낯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제가 원체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내가 채식을 할 일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올해 여름 큰 후폭풍을 몰고 왔었던 장마가 기후위기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개인이 환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그때 우연히 햄버거에 들어가는 소고기 패티 한 장을 위해 소모되는 자원의 양과 관련한 기사를 보고 ‘고기 섭취량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하지만 동물성 식품을 완전히 끊는 비건식은 이제 막 채식에 입문하는 제게는 너무 높은 산처럼 느껴져서 일단은 비덩주의 플렉시테리언으로 살고 있습니다.

수연 : 크게 말하면 동물권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 차별을 인지하게 돼서입니다. 저는 논비건일 때도 개고기에는 거부감이 있었는데요. 인터넷에서 개고기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창일 때, 개고기를 옹호하는 쪽의 논리가 ‘개는 안 되는데 왜 돼지랑 소는 되냐’인 거예요. 그런데 너무 답답한데도 거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이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게 됐고, 그게 시발점이 돼서 착취당하는 동물 관련 다큐를 볼 때마다 “내가 먹는 고기도 결국 동물을 학대함으로써 얻어지는 산출물이 아닌가?”라는 불편함이 들었어요. 불쌍한 걸 불쌍하다고 볼 수 없고, 화나는 일에 맘껏 화낼 수 없다는 것도 싫었어요.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동물성 제품의 생산 과정을 찾아보게 됐고, 끔찍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더욱 끔찍하더라고요. 그 계기로 비건이 됐습니다.

Q.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보미 : 일단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채식을 하기 정말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은사님이 저녁을 사 주신다고 하셔서 나갔더니 장소가 고깃집이더라고요. 제가 ‘고기는 좀 별로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결국 고기는 한두 조각 집어먹고 식사류의 누룽지로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플렉시테리언을 택한 것도 있어요. 서울은 그나마 조금 상황이 낫겠지만, 제가 사는 곳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있는 식당 자체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외식 선택권 자체도 좁아졌죠. 저야 그나마 ‘고기를 완전히 끊겠다’라기 보다는 ‘소비를 줄이겠다’ 정도라 어느 정도 타협이라도 가능하지만, 완전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집밖을 벗어나는 매 순간이 전쟁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제가 예전에 지내던 나라에 비하면 한국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가공식품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건데요. 예전에 지내던 나라는 작은 마트를 가도 한편에 꼭 채식코너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인터넷의 도움 없이는 비건 식품을 찾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듯해요. 그래도 점차 비건에 대한 관심도가 오르고 있으니, 이런 상황도 점점 나아질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연 : 일단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외식을 할 때나 여행을 갔을 때가 가장 불편해요. 갈 수 있는 식당이 한정적이다 보니 동행인이 나를 배려해 준다고 해도 미안하더라고요. 또 하나는 애매하게 아는 사이에서 채식을 한다고 말했을 때 돌아오는 그 반응과 오지랖... 대표적으로 ‘건강’ 관련 얘기를 가장 많이 듣는데, 아무렴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는 제가 채식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덜 찾아봤겠냐고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무시해버리기 일쑤입니다. 마지막은 일상에서 검열이 심해진다는 겁니다. 살다 보면 내 신념과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정말 부득이하게 타협해야 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뭐야, 너 비건이라며?” 따위의 비아냥거림을 듣게 돼요. 예를 들면 출근할 때 텀블러 가져오는 걸 잊어서 어쩔 수 없이 생수병을 하나 샀더니, “비건이라면서 일회용은 왜 써?”라고 하든가... 동물성 소재 옷은 아니지만 호피나 지브라 패턴의 옷을 입었더니 “너 비건이라면서 그런 옷 입는 거 좀 그렇다”라고 한다든지요.

Q. 비건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보미 : 저는 완전한 ‘비건’도 아닌데다가, 따지고 보면 간헐적 채식을 하고 있기에 채식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기 민망하기는 해요. 하지만 이건 생각해 보면 꼭 모든 동물성 재료의 섭취를 완전히 끊지 않더라도, 저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면 누구나 채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아직도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가끔 저녁마다 치킨이나 곱창이 생각나요. 그래도 그런 순간을 잘 견디고 나면 내가 방금 동물도 지키고, 환경도 지켰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뿌듯해지더라고요. 채식이 어려운 주제,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 가볍고 신나는 주제가 됐으면 합니다.

수연 : 쾌락에 눈이 멀어 옳은 걸 보지 못하는 사람을 누가 존중할 수 있을까요. 비건이 건강 면에서 더 좋네, 나쁘네 왈가왈부 말이 많은 건 고사하고서라도, 윤리적 측면이나 환경적 측면에서는 반박의 여지없이 100% 옳다고 생각합니다. 고기를 먹는 이유가 만약 단지 ‘맛’이라면, 맛은 쾌락이잖아요. 제 생각에 육식은 앞서 말한 쾌락에 눈이 먼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동물들의 서식지를 빼앗아 개발한 것이고, 결국 완벽한 비건은 세상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실천하자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윤채 기자
sunwillrise@chungbuk.ac.kr
민주희 기자
janeausten@chungb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