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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26.09.07 월 19:58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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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선
고궁 속에 흐르는 오늘, 궁중문화축전에서 만난 전통과 현대
제 987 호    발행일 : 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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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이 짙어지는 4월의 봄날, 서울 도심의 고궁에서 ‘2025 궁중문화축전’이 막을 올렸다. 이번 행사는 지난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등 서울의 5대 고궁과 종묘 일대에서 열렸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궁중문화축전은 매년 봄과 가을, 고궁을 배경으로 전통문화와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대표적인 문화유산 축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올해 축제는 시간대별 특색을 살린 신규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기자는 축제 기간 중 4월 26일과 5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현장을 찾았다. 이번 취재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경복궁 위주의 프로그램보다는, 경희궁이나 창덕궁에서 진행된 신규 프로그램이나, 아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프로그램들에 집중했다. 먼저 야간 프로그램인 ‘경희궁 밤의 산책’을, 그다음엔 이른 아침에 진행된 ‘아침 궁을 깨우다’를 체험했다. 시간대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두 프로그램을 통해 고궁의 색다른 낮과 밤을 느낄 수 있었다.

연등을 들고 걷는 경희궁의 밤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경희궁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궁이지만,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한 역사적인 궁으로 전해진다. 기자는 이번 궁중문화축전에서 ‘경희궁 밤의 산책’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은 하루 3회, 사전 예약자에 한해 무료로 운영됐는데, 타 고궁의 유료 야간 행사와 달리 비용 부담 없이 고궁의 밤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다. 해가 저물 무렵, 기자는 도심의 번잡함이 잦아든 경희궁에 도착했다. 저녁 7시 30분, 약 35명의 사전 예약자가 홍화문 앞에 모여들었다. 참가자들은 연등을 하나씩 받아 들고 고즈넉한 궁 안으로 들어섰고, 홍화문을 지나며 본격적인 밤의 산책이 시작됐다. 산책의 코스는 ▲홍화문 ▲숭정전 ▲자정전 ▲서암 ▲태령전 순으로 진행됐다.
  첫 도착지인 숭정전 앞에서는 박광일 역사 스토리텔러가 들려주는 경희궁의 숨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기자는 웅장한 일월오봉도와 옥좌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숭정전의 모습을 만끽했고, 이후 도착한 자정전 앞에서는 정조와 그의 신하인 승전색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미니 연극을 볼 수 있었다. “이보시오!” 정조의 외침에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멈추자, 마치 조선시대 저녁 산책길을 걷는 듯한 생생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정조가 “경희궁의 밤 산책은 즐겁소?”라고 묻자, 관람객들은 “네. 즐겁습니다, 주상 전하!”라고 유쾌하게 응답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단순한 밤 산책을 넘어, 관람객들에게 역사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자정전을 지나 산책의 발걸음은 서암으로 이어졌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바위 하나가 해설사의 설명이 곁들여지니 서암은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존재로 다가왔다. 조심스레 서암의 꼭대기까지 올라서자, 경희궁의 밤 풍경이 펼쳐졌다. 도시의 야경과 고궁의 장관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시간과 공간이 잠시 멈춘 듯한,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장소인 태령전은 국악 공연이 펼쳐질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1부는 장구와 가야금의 조화로운 선율로 문을 열었다. 고요한 밤, 은은한 조명 아래 울려 퍼지는 가야금 소리는 궁궐의 정취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했다. 이어진 2부에서는 피리와 가야금의 앙상블이 리드미컬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70분간의 산책이 끝난 뒤, 관람객들은 태령문을 지나 조용히 궁을 빠져나왔다. 출구에는 정조가 애정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경희궁의 대추나무를 기리며 준비된 대추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잔잔한 국악의 여운 속에서 따뜻한 대추차 한 잔은 관람객의 몸과 마음을 데웠고, 조선의 밤 산책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도심 속 화려한 조명이 아닌, 은은한 빛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경희궁의 밤은 현대인이 잊고 지냈던 궁궐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경희궁 밤의 산책’은 단순한 문화 행사를 넘어, 고궁이 지닌 공간의 의미와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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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장구와 가야금 국악 공연.

고요한 아침, 창덕궁을 깨우다

  평소 창덕궁이 깨어나는 시간은 아침 9시지만, ‘아침 궁을 깨우다’ 프로그램은 그보다 1시간 30분 이른 오전 7시 30분에 시작된다. 기자는 여유 있게 오전 7시, 창덕궁 금호문 앞에 도착했다. 그 시각에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는 관람객 40여 명이 조용히 줄을 서 있었다. 고요한 새벽, 궁궐을 걷고 햇살을 느끼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모여든 걸 보니, 이 프로그램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한국인 대상이며, 박물관 칼럼니스트이자 문화유산 기고가인 김서울 작가의 가이드와 함께 즐길 수 있다. 2부는 외국인을 위한 시간으로 방송인 파비앙이 진행했다. 기자는 1부에 참여했다.
  입장 전 나눠준 이어폰을 착용하고 인정전으로 향하는 길, 사람 하나 없는 궁의 정적 속에서 인정전 마당의 박석은 아침 햇살을 은은히 반사하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그 장면은 ‘궁궐이 눈을 뜨는 순간’이라 표현하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창덕궁의 건물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곳은 선정전의 청기와였다. 값비싼 재료로 제작된 이 기와는 날씨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 덕에 청기와의 푸른 빛은 더욱 눈이 부셨다. 김서울 가이드는 “비 오는 날엔 기와가 흑빛을 띠기도 해요. 창덕궁은 날씨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게 매력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그 밖에 김서울 가이드는 “일반 개장 전,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들어올 수 있어요. 조용한 궁궐을 천천히 걷다 보면, 날씨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관람객과 함께 나눌 수 있죠. 흐린 날도 아름답고, 햇살 좋은 날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어요. 회차마다 새로운 궁궐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라며 프로그램만의 특별한 매력을 말했다. “창덕궁을 걸을 때 가이드님만의 팁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시선을 바꾸는 걸 추천해요. 저는 벤치에 앉아 있거나, 발을 보며 걷기도 해요. 늘 위를 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평소엔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궁궐의 숨은 디테일을 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산책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이어졌다. 부용지에 이르는 길은 다소 오르막이었지만, 짙은 초록빛 풀과 나무들이 지친 몸을 위로했다. 부용지에 도착하자 기자를 포함한 관람객들 사이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부용정과 주합루가 함께 어우러진 부용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로 보였다. 주합루에 앉아 고요한 물가를 바라보니, ‘신선놀음’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가만히 부용지를 바라보니 요즘 유행하는 ‘물멍’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부터, 조선의 왕들도 같은 방식으로 고요를 즐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용지를 지나 연경당과 관람지에 이르면, 3개의 못이 하나로 합쳐진 넓은 연못이 펼쳐진다. 정자와 물,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는 그 풍경은, 마치 조선 시대 산수화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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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합루에 앉아 바라본 부용지.

  마지막으로 돈호문으로 되돌아오자, 참가자들에게는 4가지 다과 세트와 함께 산책 도중 촬영한 단체 사진이 선물로 제공됐다. 하루의 시작을 궁궐에서 맞이한 이 경험은 단순한 산책 이상의 감동을 남겼다. ‘아침 궁을 깨우다’는 새벽의 정적과 햇살, 그리고 궁궐이 지닌 시간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 외 궁중문화축전 속의 다양한 체험

  봄 오후의 햇살이 덕수궁 돌담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기자는 황제가 사랑한 취미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말에 이끌려 덕수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덕수궁 덕흥전은 ‘황실취미회’라는 이름 아래, 고종이 즐겼던 가배 시음과 옥돌 체험, 고종이 즐겨들었던 플레이리스트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전 예약 없이 현장에서 바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덕흥전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양탕국’이라 불리던 조선의 커피는, 고종의 손을 거쳐 백성들에게까지 친숙한 음료로 자리 잡았다. 황실취미회에서는 고종이 즐겨 마셨던 이 커피에 대한 해설과 함께 핸드드립 시연이 진행됐다. 전통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커피가 고궁의 풍경 안에서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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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영녕전에서는 ‘창작 뮤지컬 묘현, 왕후의 기록’을 관람했다. 이 뮤지컬은 조선 시대 유일하게 왕실 여성이 직접 참여했던 국가 의례, 묘현례를 모티브로 한 공연이었다. 공연장 입구에서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종이 모자와 컵 받침을 나눠줬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무대 앞으로 들어서자, 종묘 영녕전 앞에 간이의자가 마련됐다. 고요했던 공간이 점차 관객의 숨결로 채워졌다. 무대 위에 선 인물은 숙종, 인원왕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김주신. 조선 숙종 29년,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인원왕후가 종묘에 첫인사를 올리기까지의 여정이 뮤지컬 넘버와 함께 전개됐다. 궁중의 격식과 부녀의 감정이 맞물리는 순간들, 특히 김주신과 인원왕후의 듀엣 장면은 관객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종묘 자체가 무대였고, 별다른 조명이 없어도 햇살이 대신해서 비춰줬다. 뮤지컬에는 전통 의례가 지닌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서사와 음악이 녹아들어 있었다. 약 4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과거 한 시대의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열기를 그대로 영녕전 옆 악공청에서는 묘현례에 등장하는 세자빈이 입었던 옷을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 체험 행사도 진행됐다. 관객들은 뮤지컬 관람에 그치지 않고 묘현례의 주인공이 돼보는 체험까지 함께하며 축제의 여운을 이어갔다.

  고궁은 남겨진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공간임을 ‘궁중문화축전’을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천천히 걷고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고궁 안엔 존재한다. 낮에는 햇살 아래 고요히 눈을 뜨고, 밤에는 연등을 들고 어둠을 벗 삼아 걷는다. 때론 커피 향기와 국악이, 때론 뮤지컬과 옛 의례가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물며 마주 선다. 이런 축제를 통해 고궁은 ‘관광지’를 넘어,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호흡하는 ‘살아 있는 문화 공간’으로 다가온다. 사라진 시간을 체험으로 되살리는 일, 그것이 바로 ‘궁중문화축전’의 매력이 아닐까?


황인선 기자
dlstjs03@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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