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면적이 적어서 그런지 농촌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는 아직 대학 출신이 없고 재학생도 우리 학교 일학년의 M군 오직 한 명뿐이었다. 초등학교를 나오면 남학생은 중학으로 여학생은 가정으로 돌아감을 상례(常例)로 여기로 있는 이들의 말을 듣고 우리 충북대학 남녀학생들의 행복한 생활(?)이 되살아 생각나기도 하였다.
돌이 하도 많아서 탐라도의 삼다(三多)를 연상(聯想)케 하였으며 이곳의 삼다로는 돌, 밭(火田), 감나무를 손꼽아 봄이 무난한 듯하였고,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청년(상대적으로)을 넣어 봄직도 하였다. 이 동네는 오수의 한 주민이 일러준 바와 같이 4~5년 전만 해도 문명을 등지고 사는 어둠 속의 빈촌이었지만 충북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은 이래 점점 시야를 넓혀 농사에도 의욕에 가득 차 경제적으로 일하게 되어 점점 발전하였으며 그 결과로 지난해에 도ㅇ면, 농촌지도소의 후원과 지도아래 청년·부녀회와 4H 회원의 눈부신 활약으로 A급 3등이라는 종은 성적을 얻은 바 있다. 상으로 받은 미싱, 상금 등을 공동관리하고 공공물을 애용하는 이들의 공중도덕심에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져 버렸다.
M군도 말하듯이 본성이 부지런하고 순박한 요동부락민들은 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도 많으며 다만 겨울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떡과 곶감을 내어놓고 즐긴가고 한다.
1세대당 보통 6~8백 평의 논을 소유하고 밤나무에서도 적지 않은 수확을 올리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세대당 3~6천 평의 화전(火田)이며 주로 조와 콩, 담배, 박하 등을 재배하여 정미소, 탁아소, 작업장, 이발소, 협동조합 등 모든 것을 잘 갖추고 있었다. 화전이라 처음에는 많은 수확을 벌 다른 노력도 들이지 않고 얻지만 몇 해 후에는 비료를 주어야 하며 윤작(輪作)이 불가피한 듯하다.
우선 먹고 살기 위하여 산꼭대기까지 화전을 만들고 있지만,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이 지역에 ‘언젠가는 재난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금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12일에는 부락민과의 농사상담 후 노력 봉사에 고단한 몸을 쉬려고 자리에 누우려 할 때, 밖에서 전달된 호출 명령에 따라 도서실로 들어가니 의외에 삼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따서 늘어뜨린 낭자님들이 환영한다. 4H 지도책의 사회로 옥수수, 소주 파티로 대접받았다. 유상리 노래와 비료 노래도 배우고, 우리도 부르며 여러 이야기 끝에 다른 4H와는 유별나게 그 자리에 모인 상록 4H가 요동 4H(남)와 분리된 일화를 언변도 좋으신 지도책께 듣고 당사자들 앞에서 실례지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합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밤 12시. 도서관에서 꾸벅이든 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생각은 끝없이 달려간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농촌의 현실, 국가의 빈곤, 서글픈 한반도의 역사, 통일신라의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래 강대국에 매달려 신음하여 온 이 강토. 더욱이 20세기 이후의 민족자결주의, 자유주의의 세계적 조류도 외면하고 강대국의 전장화 한 이 강토 금수강산. 해방 후 20년간의 업적이라면 미군정 3년, 6.25 골육상쟁(骨肉相爭), 그 외에 무엇이 있는가?
충북대학보 제38호(1964년 9월 10일자) 게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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