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버려진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 아이러니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답은 있다.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흔히 ‘리폼’이라고 부른다. 색이 바랜 가구, 낡은 청바지, 목이 늘어난 티셔츠까지 ‘리폼’을 행할 수 있는 종류는 다양하다. 이 중 신발을 화려하게 변신시킴으로써 신발 리폼의 새 장을 여는 이가 있다. 신발 리폼 장인 이덕희 씨가 그 주인공이다.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공부보다 기술을 하는 것이 어려운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일찍이 기술전선에 뛰어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구두 가죽부터 디자인까지 기술의 다방면을 배웠고, 생계를 위해 익힌 구두 기술은 곧 그의 생업이 됐다. 그렇게 시작한 신발과의 인연은 40년간 이어져왔다.
꾸준히 쌓아온 그의 기술은 점차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두각을 드러냈고, 1981년 여성수제화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종업원의 수도 늘어났고, 외부로 신발을 공급하는 거래처도 많아졌다. 거래처에서는 모두 그의 구두 디자인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떨치는 그를 시샘이라도 하듯 위기는 불현듯 닥쳐왔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해요. 2006년 1월 10일 새벽 3시였죠. 전기 누전으로 인한 화재였는데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소식에 앞이 깜깜했어요. 큰 아들의 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200평이 넘는 공장에 퍼진 불길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더군요. 실 한 오라기도 못 건졌죠”
화재로 잃은 것은 일의 터전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디자인 창작물들도 함께 타버렸다. 그가 인생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잃은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도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아요. 그 정도로 끔찍하고 생생한 기억이죠. 인생의 전부를 쏟아 부었는데 이제 제게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되자 그때부터 이 일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아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자고 설득했지만 저는 허탈함이 밀려오면서 모든 것이 지겨워졌죠”
그는 그렇게 일에 열정을 잃은 채 방황을 했다. 그 햇수만으로도 무려 3년이었다.
“형이 중풍으로 인해 장애인이 됐어요. 방황하던 3년간 그런 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저의 기술을 전해주고 그들의 자립을 돕는 시설을 설립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회적인 규제가 심해 현실적으로 여건이 되지 않았죠”
오랜 방황 끝에 그는 다시 신발을 잡았다. 그와 신발 사이에는 질긴 인연이 존재했다.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한 신발을 만지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이 일이 내게 천직임을 실감했죠. 동네 상가에 4평 남짓한 공간을 얻어 다시 열정을 불태웠죠”
이번에는 구두 제작만이 아니었다. 신발 수선에도 손을 뻗었다.
“사실 구두 기술을 배운 사람들은 수선을 가장 밑바닥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더군요. 다른 이들의 신발도 가족들의 신발을 만지는 것과 같았어요. 우스갯소리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의 신발에서 나는 냄새조차 향기롭더라고요”
신발 수선을 시작하자 감각 좋은 그에게 사람들은 다양한 문의를 했다. 누군가는 구두의 네모난 앞코를 둥근 앞코로 바꿔달라고 부탁했고, 다른 누군가는 운동화의 굽을 높여달라고 부탁했다.
“손님들은 버릴 법한 신발을 새롭게 탄생시켜주길 원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워왔던 구두 디자인을 했던 감각과 수선 기술을 발휘하니 이전과는 또 다른 신발이 탄생하더군요. 마치 제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리폼의 참된 즐거움이었죠”
그가 이전에 운영했던 공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의 화려한 리폼 솜씨에 대한 사람들의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는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돌파구도 마련했다.
“인터넷 카페 및 블로그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신발 수선 및 리폼의 결과를 꾸준히 올리며 온라인으로도 주문을 받았죠.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국 각지에서 문의가 쏟아졌어요. 유행이 지난 구두, 강아지가 물어뜯은 운동화 등 다양한 사연을 담고 있는 신발들에 대한 문의였죠”
한 달 700여 켤레의 신발들이 수선을 위해 그의 가게에 머무르며, 인터넷 카페에는 하루 평균 100여 개의 문의글이 달린다. 해외에서도 택배가 와 그의 가게를 찾을 정도니 신발 리폼과 관련한 틈새시장을 이용해 재창업에 성공한 셈이다.
“새로운 신발을 만들 때는 정해진 대로 제작을 하면 되지만, 리폼은 워낙 범위가 다양하다보니까 원칙이 없어요. 게다가 손님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해야 하기에 가끔은 불평을 들을 때도 있죠. 하지만 그냥 버릴 수도 있는 신발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리폼은 그 의미가 깊어요. 누군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신발이라면 의미가 더욱 커지죠”
이렇게 열정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그의 인생이 담긴 기술을 전수받을 후계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었다.
“저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요. 오랜 시간을 쏟아 부어 매진해야 하는 분야라 그런지 선뜻 뒤를 잇겠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이 없죠. 진정으로 배우길 원하는 친구가 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에요”
유럽의 경우, 장인들의 일터가 하나의 관광명소가 될 정도로 대우가 좋지만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초라한 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대우를 무작정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대우를 스스로 높이고자 끊임없이 앞장선다.
“‘수선전문건물’을 만드는 것이 제 인생의 최종 목표에요. 염색, 가죽 등 수선의 분야별로 재능 있는 전국의 장인들이 함께 하는 장소인 것이죠. 이런 건물이 있다면 굳이 사람들이 수선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고, 재능 있는 장인들의 대우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전문적인 후계자 양성에도 큰 도움이 될 거고요”
리폼을 통해 새로움을 불어넣는 그. 새롭게 탄생된 신발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고 다시 되새긴다. 그간 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거쳐 갔을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에서 신발을 향한 올곧은 열정이 느껴졌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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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