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그 장소로 가면 되는가”.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없던 익숙함을 박완규 전 주간교수님을 만나 뵙기 10분 전, 전화통화로 먼저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그가 알고 있던 신문방송사도 많이 변한 듯 보였다. 그는 신문방송사로 가는 동안 연신 주위를 기웃거리며 신기해했다. 감회가 새로운 듯 보였다.
우리 학교 신문이 창간된 지도 벌써 60년이 흘렀다. 그는 1975년 9월부터 1978년 4월까지 편집국장(현 편집간사)으로, 1989년 2월부터 1991년 2월까지 주간교수로 데모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대적 상황에서 신문사를 책임졌다. 그가 처음 편집국장으로 들어온 계기도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언론기관, 그것도 대학 언론기관에서 유신 정권 시절에 열정이 넘치는 학생 기자들과 중간을 타협하는 점이 어려웠겠죠. 그래서 내 은사였던 김인관 주간교수는 타협의 중간점을 찾고자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땐 독일어와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시간 강사였지만 주간교수님을 믿고 망설임 없이 편집국장으로 나설 수 있었죠”
사실 그의 존재가 학생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원래 학생의 자리였던 편집국장의 자리를 그가 맡게 됨으로써 학생 기자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편집장 자리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권은 편집국장에게로 넘어갔다. 이에 학생들의 반발은 거세져만 가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순탄치 않은 신고식을 치뤘다. 편집국장으로서 그의 첫 신문에는 이와 관련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
“교열 과정에서는 분명히 보지 못했던 치명적인 실수가 신문에서는 존재했어요. 내 이름 마지막 글자가 잘못 나온 것이었죠. 이게 실순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게 뭡니까. 알면서도 그저 실수라고 말할 뿐이었죠. 학생들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들 자리를 뺏은 격이니 얄밉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죠. 그건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웃어넘기는 것은 똑같아요”
편집국장으로 시작해 1989년, 자연스럽게 그는 주간교수까지 맡았다. 그가 주간교수가 된 첫해에도 데모가 터졌다. 그는 그때도 여전히 학생들과 이견을 조율하는 데 온 힘을 다했노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가 ‘타협’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질 좋은 ‘기사’에 온 힘을 쏟았다. 지금보다 출판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의 신문 발행과정은 얼마나 고됐을까.
“아휴, 말도 마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무척이나 고됐습니다. 우리는 마감을 2번 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학교 신문사에서 기자들마다 원고지에 썼던 초고에 원하는 편집을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한 번. 또 나머지는 인쇄소에서 교열을 보고 인쇄까지 한 번. 휴, 신문 인쇄하는 날이면 서울의 작은 인쇄소까지 직접 찾아가야 했다니까요. 학생 네 다섯에 교수들까지, 그때 겪었던 고생을 말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그때 충북대신문의 인쇄를 책임지던 장소는 서울의 ‘신아일보’였다. 신아일보는 조그만 언론기관으로 출판기술이 원활하지 않던 그 당시 대학의 신문 발행을 도와줬다. 그 시절은 활판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인쇄를 책임지던 장인, 즉 인쇄공들의 입김이 꽤나 거셌다. 그는 신문 발행보다 인쇄공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들도 폐쇄된 집단에서 하나의 권력을 갖고 있던 전문가들, 장인이기 때문에 그들만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의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처럼 그들도 그들의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은어로 일본어를 사용하며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죠.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어요. 글쎄, 한번은 담배를 사다주지 않았다고 일부러 판을 망친 적도 있었죠. 참 너무했지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우스운 추억이라 웃고 넘깁니다”
현재 대부분의 작업을 컴퓨터에 앉아 파일로 전송하는 마감형식과는 다른 방식에 생소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과거 마감 분위기는 어땠을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과거 학보사 분위기는 좀 오묘했어요. 시대적 상황에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근데 자꾸 위에서는 막으려고만 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늘 무엇이라도 금방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계속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학생들끼리 단합이 굉장히 잘됐지요. 다 같이 휩쓸려 어울리고, 술도 많이 마시고.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계속된 질문이 바닥날 때쯤 나에게도 질문이 되돌아왔다.
“요즘 신문사는 어때요? 요즘은 각각 제 갈 길이 바쁘지요? 개인주의적 성향이 지금 대학생들을 지배해 본인 기사만 책임지면 끝이잖습니까. 옛날처럼 저널리즘 실현을 위해 학생 기자들끼리 똘똘 뭉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죠. 하지만 요새 신문사에서는 아카데믹한 성격만 보여서 그 점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기자라면 언론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풍부해야 해요”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의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옛날 당태종이라는 사람을 아나요? 우리에게는 한쪽 눈이 먼 사람, 또는 그가 다스리던 시대를 정관의 치라 불리며 태평성대를 이룬 왕으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반역자로 볼 수 있는 그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위인이죠. 하지만 그가 이런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숨겨진 조력자인 ‘위징’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위징은 일생 동안 당태종보단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왕에게 직언을 퍼붓는 역할을 했죠. 그는 참 현명했어요. 정직하고 소신 있게 자신의 발언을 하긴 했지만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게끔, 왕이 스스로 깨닫게끔 직언을 했지요”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래, 기존 언론은 고정된 틀이 있어요. 이건 오랫동안 굳어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건 개개인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끌어안은 집단에서 더 강해지죠. 하지만 대학언론은?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온전한 자기가 형성이 돼있지 않죠. 기존의 자기 한계를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 한계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학 기자만이 펼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죠. 그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걸 미련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만 말해선 안돼요. 자유스럽되, 기존의 틀과는 맞서면 안 돼요. 위징처럼 교묘하게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진정한 기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중국 당나라 당태종이 이뤘던 ‘정관의 치’. 시대적 상황에 맞서 올바른 목소리를 내던 학생 기자들과 그들의 호기롭던 기세도 다 포용한 박완규 교수. 진정한 언론이 꽃을 피웠던 태평성대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바래진 기억 속의 열정을 다시 넘겨받았다. 그의 말을 조언삼아 앞으로도 평화롭길 기대해본다.
이청 기자
echung77@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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