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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뚝심있게 걸어온 한 길, 중화요리계의 전설을 만들어내다
제 894 호    발행일 : 2015.06.01 
이연복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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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현재 운영되고 있는 중화요리 전문점 2만여 개. 그야말로 중화요리 춘추전국시대이다. 이 속에서도 한국 중화요리계를 이끈 전설적인 중화요리 4대 문파 아서원, 홍보석, 호화대반점, 신라호텔 중식당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는 고수들이 있다. 특히 호화대반점 출신으로 43년째 한 길을 걸어오며 ‘대가’의 명성을 얻게 된 이가 있다. 바로 최근 JTBC에서 방영 중인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스타 셰프로 떠오른 이연복 주방장이다. 그가 대가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지금 바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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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시 30분 기자가 이연복 주방장을 만나기 위해 연희동에 위치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식당을 방문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방 안은 여전히 분주했다. 21시에 마감한 후에도 요리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이연복 주방장이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나오는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반짝이는 눈과 입가의 미소는 여전한 채로 기자를 맞이했다.
  분주한 주방을 벗어나 자리를 옮겨 그가 맨 처음 들려 준 이야기는 1971년 화교 출신인 그가 13살에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중화요리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화교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등록금이 만만치 않았어요. 제 밑으로 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 부담은 더했죠. 그래서 등록금을 내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내지 않은 학생들을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불러세워 칠판 앞에서 따로 수업을 듣게 했어요. 화가 많이 났죠. 그때부터 부모님 모르게 학교 가는 시간에 학교 대신 근처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다 가기도 했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하지만 왜소한 13살 소년에게 주어진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가벼운 철가방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무거운 배달통을 들고 매일같이 두 다리로 배달을 했다. 이후에도 여러 중화요리 전문점을 전전하며 배달과 재료손질 등의 일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7살이 되던 해에 우리나라 최초로 호텔 내에 들어간 중식당이자, 중화요리 4대 문파 중 하나로 손꼽히는 호화대반점에 들어가 요리의 기본기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요리의 기본기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일반 가정에서 쓰는 칼이 아닌 날카로운 중식용 칼에 베이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빠른 시간에 완벽한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나가야 하는 주방의 분위기는 살얼음판과도 같았죠. 하지만 이것들이 제 인생에 큰 어려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꼭 극복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칼에 베이는 두려움, 주방 분위기 등을 극복해나가며 꾸준한 노력으로 다져간 그의 실력은 점점 빛을 발했다. 19살의 나이임에도 일명 ‘둘째 칼판’(칼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휘말린 폭력 사건으로 인해 그의 인생에 고비가 찾아오게 된다.
  “사람에게 받은 배신감과 그로 인한 외로움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당시 함께 일하던 제 친구들에게 시비를 걸던 사람이 있었는데 말로 제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괴롭힘이 계속돼 그것을 참지 못하고 말았어요. 이 때문에 해고를 당했고, 해고된 이후에도 요식업계에 소문이 돌아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저는 그 친구들을 위해 한 일이였는데 막상 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제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많이 외롭고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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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22살에 되던 해 대만대사관 총주방장의 자리에 합격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당시에 대만대사관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어서 총주방장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지만 최연소 대만대사관 총주방장의 자리는 분명 숱한 고비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려는 그의 꾸준한 노력이 맺은 소중한 결실이었음에 틀림없다.
  “대만대사관에서 일하면서 제 인생을 변화시킬 만큼 소중한 것도 배울 수 있었어요. 당시 저는 눈빛이 상당히 날카로웠는데 그걸 대사님도 느끼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한 연습을 꾸준히 하라고 권해주셨죠.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일부러 편안하게 웃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연습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제 자연스럽게 편안한 표정이 나오고 인상도 많이 바뀔 수 있었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인자한 미소도 그의 노력이 빚어낸 결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대만대사관 총주방장을 하면서 또 다른 고비를 맞게 된다. 대만 대사의 권유로 하게 된 축농증 수술 이후 후각이 마비된 것이다. 재료가 상해도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속에서도 또 다른 길을 찾아냈다. 바로 미각을 발달시킨 것이다.
  “냄새가 맡아지지 않을 때 정말 많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 일이 제 일을 그만두게 하지는 못했어요. 후각 대신 미각을 발달시키는 방법을 택했고, 이를 위해 철칙도 세웠어요. 먼저 아침에 밥을 먹으면 배가 불러서 간을 볼 때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밥을 먹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담배와 술은 혀를 둔하게 만들기 때문에 금연을 했고, 술을 마시게 될 때에도 절주하며 마시고 있어요” 현재 그의 빛나는 모습은 이처럼 자신의 일에 있어 누구보다 철저한 그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대만대사관 총주방장 생활을 정리한 후에 그는 일본으로 훌쩍 떠났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당시 엔화의 가치가 한화의 10배였기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주방보조 일부터 가게 운영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한국에 있을 때보다 돈도 많이 벌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이에 그는 일본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또 다른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일본인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 친절함 등을 체득했어요. 일본에서 배운 것들이 새로운 시작에 앞서 제 마음을 다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뿐만 아니라 그간의 인간관계도 정리했어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와 외로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 정말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갔어요. 제 마음과 주변을 정리하고 현재 운영하고 있는 중식당을 열어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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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처음 열었던 중식당은 현실적인 문제로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하지만 그의 중식당을 찾는 단골은 점점 늘어갔다.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굳이 그의 식당을 고집하며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4번이나 식당을 옮겼음에도 단골이 여전하다는 것은 그만의 차별성과 실력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식당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 그의 뒤를 이어나갈 후배들도 양성하고 있다. 하지만 총주방장으로 주방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을 지휘해 나가면서도 그는 일을 가리지 않는다. 시간이 나면 설거지도 도맡아 한다.
“주방 안에서는 일에 구별을 두지 않아요. 일의 중요도에 따른 순서만 있을 뿐이에요. 요리를 끝내고 시간이 남으면 같이 정리도 하고 설거지도 같이 하는 거죠”
  이처럼 자신의 위치와 상관없이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후배들에게도 겸손할 것을 강조한다.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조금 할 줄 안다고 거만해지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런 학생들은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함께 하지 않는 편이에요. 때문에 후배들을 뽑을 때 인성을 제일 먼저 봐요. 기술은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데 인성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저부터도 매순간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현재 그는 많은 후배들 중 2명을 후계자로 정해놓은 상태이다.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후배들에게 중식당을 하나씩 내어주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 중 일부를 받아 아내와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해봐야죠”라고 답하며 해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는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인생을 요리에 비유해 보자면 동파육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파육 한 접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6시간 이상 정성을 들여야 해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꿈을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집중해서 해보고 이 일을 하면서 힘든 것도 감수할 수 있다면 진짜 자신의 일이 맞다고 판단할 수 있겠죠”
  인생 절반 이상을 한 길만 걸어온 그에게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고비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다른 길을 생각해 본적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지금도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에 많이 지치기도 해요. 그래서 잠깐씩 하는 방송 출연이 즐거운 일탈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요리를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요리는 제 인생이니까요”라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가 만들어내는 요리는 배를 불리기 위한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그의 인생이었다. 우리나라 중화요리계에 한 획을 그은 그가 또 어떤 전설을 요리해 나갈지 기대된다.


김도연 기자
khra0131@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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