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화는 검은 묵으로 그은 선과 화선지의 흰 여백이 함께 어우러져 그 미를 뽐내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 중 하나이다. 화선지 위에 검은 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 화백은 마음가짐부터 몸가짐까지 바로잡으며, 붓을 잡고 있는 손끝에 온 집중을 다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렇게 그은 선 하나엔 화백의 혼이 담겨있다고 한다. 그 말처럼 양팔 대신 의수를 찬 석창우 화백이 그린 선에는 그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화백, 인생을 그리다
평범한 중소기업의 전기관리자로 살아가던 석창우 화백에게 인생의 전환점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4년 10월 29일, 전기시설을 점검하던 도중 22,900V에 감전돼 양팔을 잃게 된 것이다. 1년 반 동안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양팔을 절단하고 13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9세였다.
사고 이후 요양차 전주에 머무르며 불편한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하던 중 그는 4살배기 아들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에 생애 처음으로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림에 대한 뜻을 품었다.
그러나 양팔이 없는 그가 그림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배움을 청하러 화실에 갈 때마다 양팔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힘들다며 번번이 퇴짜를 맞은 것이다. 거듭된 거절에 그는 또다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사군자’였다. 여러 가지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먹색 하나만 사용한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효봉 여태명 선생이 운영하는 서예학원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내가 사군자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대답은 안하고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시기만 하셨지. 그래서 여기서도 거절당하면 더는 갈 곳이 없단 생각에 내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청하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며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셨지”
그로부터 한달 뒤 여태명 선생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보자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팔이 없는 탓에 도구와 몸을 일체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때에 찾아온 기적 같은 기회에 그는 힘든지도 모르고 즐겁게 연습에 매진했다.
“나는 몸이 불편하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는 더 해야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에 매진했지. 그렇게 십 년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감각이 생기더라고. 그 뒤로도 꾸준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조금씩 그림을 내 것으로 만들었지”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화백’이라는 값진 칭호를 달게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경제 활동은커녕 혼자서 밥도 먹지 못하는 내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내의 내조 덕분이었지. 아내가 경제적 문제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그림만 열심히 그리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줬어”
화백, 족적을 남기다
고된 연습 끝에 그는 그만의 새로운 화풍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서예 크로키’였다. 처음 시작은 서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서예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가 더욱 깊게 서예를 알고 싶어 여러 곳에 관심을 가지던 중 마침 우연한 기회로 누드 크로키를 접하게 된 것이다.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사람들이 전부 외각선만 그리는 거야. 그래서 서예로 크로키를 그려서 일필휘지로 그 외각선뿐만 아니라 형태 전체를 그려보자고 마음먹었지”
그는 이 서예 크로키를 그리기 위해 몇 년 동안 이나 바깥선만 그리는 연습을 하고, 그것에 익숙해지자 비로소 서예 크로키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습을 거듭한 끝에 그는 서예 크로키의 개척자이자 일인자가 됐다.
그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수많은 해외전 개최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에서 12회의 전시회를 열었고, 34회의 초대전을 열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화백으로서는 엄청난 경력이다.
“외국 사람들이 그림에 관심이 많잖아. 집집마다 그림이 걸려있을 정도로. 그래서 해외로 나가보자고 생각했지. 전시회를 열려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길이 열리더군”
해외진출을 위해 그가 가장 처음 찾아간 곳은 한국문화원이었다. 그곳을 통해 갤러리를 소개받아 몇 번 전시회를 열다보니, 어느덧 여기저기에서 그를 초대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퍼포먼스' 역시 그의 특별한 경력 중 하나다. 그의 퍼포먼스는 바로 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에서 커다란 화선지에 서예 크로키를 그리는 것이다. 이 특별한 무대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화가 어색한 탓에 가라앉았던 개인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그는 관객들 앞에서 직접 서예 크로키를 시연했다. 이후 몇몇 개인전에서도 시연을 펼쳤는데, 그것이 큰 인기를 얻어 각종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겼고 작년에는 2014 소치장애인동계올림픽 폐막식이라는 큰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무대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려. 그곳에는 관객도 카메라도 없이 오직 화선지와 그 위에 내가 든 붓밖에 없는 거지. 그렇게 나 혼자만은 공간에서 시간과 싸우면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가 무대가 크든 작든 간에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양팔이 없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 덕분이었다. 그 시선들이 양분이 되어 큰 무대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그는 ‘그 과정이 모두 하나님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화백, 미래를 이야기하다
그의 이야기가 중학교 도덕과 미술 교과서에 실릴 만큼 어린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석창우 화백은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네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기자가 현실이 버거워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학생들에게 전하는 조언 한마디 부탁드리자 금세 천금 같은 말을 아낌없이 건냈다.
“우선 좋아하는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나한테 맞는 걸 하는 거야. 자신의 몸짓에 맞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지. 마치 소라게가 몸집이 커질 때마다 조금씩 큰 것으로 껍질을 바꾸듯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연습을 통해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거지. 팔이 없는 내가 붓을 집는 연습을 하고, 선을 긋는 연습을 하고, 서예를 배우는 단계를 밟아가며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온 것처럼 말이야”
힘차고 곧은 그의 화풍과 닮은 그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듯한 한마디였다.


김남희 기자
namhee6741@cbnu.ac.kr








김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