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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주
뜨거운 화로 속 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대장장이
제 900 호    발행일 : 2015.11.16 
최용진 대장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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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로의 불빛과 열기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그 앞에 놓인 크고 작은 망치들. 사극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존재하는 대장간이다. 농업이 주를 이뤘던 6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장장이는 마을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현재 대장장이는 말조차 어색할 정도로 사라진 직업들 중 하나다. 산업화가 진행되며 콘크리트 바닥이 생기고 건물이 하나씩 들어서며 마을에 대장간이 사라질 때 꿋꿋이 그 길을 지킨 장인. 41년 동안 한 길을 걸으며 쇳덩어리를 뜨거운 화로 속에서 예술로 승화시킨 국내 최초 대장간 부문 고유기능 전승자 최용진 대장장이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년 최용진, 대장간에 첫발을 딛다

  ‘대장간’이란 빨간 글씨의 팻말을 따라 대장간에 들어서는 순간, 기자는 장인이 일하는 곳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기자의 눈에 띈 것은 머리 위로 걸려있는 호미와 낫, 칼과 같은 다양한 도구들이었고, 몇 십 년 동안 장인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 철가루가 쌓인 바닥이었다. 그 안에서 기자는 갓 만든 낫의 날을 가는데 열중인 최용진 대장장이를 만날 수 있었다.
  환한 미소로 반겨준 그는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화로 쪽으로 기자를 이끌어 넓적한 쇠덩어리를 보여주며 이를 소개했다. “이것은 공장에서 기계로 대충 두드려 온 쇳덩어리인데 비유하자면 옷의 원단이나 다름없어요. 이 쇳덩어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줄게요”
  이어 그는 쇳덩어리를 화로에 빨갛게 달구며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냈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다. 5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는 시내에서 다양한 잡일을 했고 5촌 당숙을 따라 집 짓는 일을 도왔다. 그때까지 그에게 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 당시는 1960년대 초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시기였다. 농경사회에서는 밭을 매야 했기 때문에 대장간이 꼭 필요했다. “아버지가 대장간 일을 하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을 거라는 말에 솔깃했지만 그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 일이 제 천직이 될꺼란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에게 마침 풀무질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은 그가 대장장이로서 내딛은 첫발이 됐다.

품질로 인정받는 대장장이로 거듭나다

  그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충주에 살고 있던 그의 누나가 충주로 이사와 대장간 일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충주는 많은 대장간이 있었고 그중 그의 매형은 특히 충주에서 알아주는 실력있는 대장장이였다. 그는 제대로 된 밥벌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제대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매형에게 대장간 일을 배웠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난 대장간 일을 너무 좋아했어요. 하나하나 배울 때마다 설렜고, 스펀지마냥 배운 것을 빨리 흡수해 늘 주변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어요” 그는 하루하루 그의 매형에게 새로운 대장간 기술을 배워 실력을 쌓았다. 4년째 되던 해 그는 자립해 현재 대장간이 위치한 증평군 증평읍에 대장간을 세웠다. “자립할 당시 일손이 많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실력에 대한 신뢰를 얻어야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시작이 힘들 듯 그도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를 차분히 견뎠고 실력으로 이겨냈다. 이를 증명하듯 증평 내에 실력 좋은 젊은 대장장이라는 소문이 났다. 이렇게 그는 증평읍 내 알아주는 대장장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중국의 값싼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면서 그에게 또 한번 시련이 오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완성도 높고 품질 좋은 도구는 중국산 농기구를 제치기 충분했다. “호미 하나를 만들어도 우리나라에 맞게끔 제작해야 해요. 하지만 중국제품은 영 엉망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중국산 값이 싸도 사람들은 결국 저희 대장간으로 찾아오게 됐어요” 높은 수준의 기술이 녹아 있는 그의 도구로 인해 그의 대장간의 화로는 아직도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무쇠를 예술로 창조하는 장인

  대장장이가 만드는 도구는 단단한 쇠를 이용해 다양한 형태로 제작하고 창작하는 예술의 한부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장간에서 쇳덩어리를 이용해 도구를 만드는 일은 무쇠의 예술, 철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무쇠를 실용적인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숙달이 필요하죠” ‘예술’의 정의를 살펴보면 어떤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 또는 능력이라고 나와 있다. 쇠는 1,300도에서 1,400도에 녹기 시작한다. 하지만 보통 대장장이들이 일하는 온도는 1,600도이기 때문에 쇠가 녹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과 실력을 요구한다. 대장장이들은 쇠가 녹는점을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확인하고 또 확인해 감을 익혀야 하며 끊임없이 풀무질해야 한다. “쇠의 녹는점을 놓쳐 끊어져도 보고, 풀무질하면서 실수도 해보는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한 재산이에요. 이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죠”
  “쇠의 마음을 읽는 것은 대장장이에게 생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연철을 1,000도의 화로에서 꺼내 급하게 냉각을 시키면 성질이 변한다. 물렁물렁했던 성질의 연철은 열을 주고 이를 냉각시킴으로써 단단한 강도의 철로 성질이 바뀐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한 제철에서 다양한 성질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를 읽는 것을 쇠의 마음을 읽는다고 말한다.


대장장이 최용진, 그의 41년을 되돌아보며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볼품없었던 쇳덩어리는 7, 80년대나 볼 수 있는 멋진 엿가위로 탄생했다. 엿가위를 부딪치는 소리는 청아한 악기 소리 같았다. 그는 완성된 엿가위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대장장이가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쇠를 이용해 예술을 창작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그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늘 즐겁게 일을 시작한다. 이어 그는 기자를 대장간 입구로 이끌었다. 대장간 입구를 다시금 살펴보니 정부마크가 새겨진 ‘기능전승자의 집’이 눈에 띄었다. 이 당시 산업화로 대장장이를 비롯한 다양한 옛 직업이 사라지는 시기였다. 정부 주도로 사라지는 직업 중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기능 및 예능에 대해 보호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는 시청에 가서 지방 무형문화재로 신청을 했고 당당히 95년도 11월에 대장간 부문의 고유기능 전승자로 선정된 지방 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
  그 당시는 무형문화재는 국가 무형문화재하고 지방 무형 문화재로 나뉘었다. 이 두 개의 유형은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방 무형문화재가 국가 무형문화재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보수도 높았다. 최근에도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는 보수를 받는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은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이전보다 힘을 안 쓰는 거 같아요. 무형문화재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재산이고 문화인데 힘든 이 길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고 정부에서도 별로 신경써주지 않아 걱정스러워요” 현재 그를 이을 후계자조차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의 한숨은 더욱 깊었다.
  그는 우리 학교 학생들과 현시대 청춘들에게 그의 인생에서 얻은 것을 토대로 조언했다. “나는 자신이 좋아하고 전망 있는 한 분야를 택해 거기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성공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학생들도 한 분야의 길에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앞의 일을 내다보고 뒤에 일에 교훈을 얻으며 인생을 설계했으면 좋겠어요” 
  대장간 화로 불길에 비친 앳된 청년이었던 순간부터 중.장년 그리고 현재 노년에 접어드는 순간까지 그가 만들어낸 순간들에서 진정한 대장장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칠 때 쯤 그의 손에는 앙증맞은 엿가위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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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기자
yellowtree@c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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