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학과 권정우
 

어떤 학생을 안다. 그녀와는 네 번 만났다(딱 잘라서 네 번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이맘때 강의실에서였다. 어머니를 주제로 쓴 산문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나 다른 학생들은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돌도 되기 전에 부모가 이혼을 해서 할아버지 손에 키워졌다는 이야기. 재혼한 엄마가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 있을 만큼 그녀는 강했다. 그렇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의지로도 걷어낼 수 없었나보다.
학기 중간에 그녀가 내 연구실에 찾아온 일이 있다. 시를 잘 쓰고 싶다고,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에게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 세 권을 빌려줬다가 학기가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돌려받았다. 내 짐작이 빗나갔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바빠서 시집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거였다. 공부 욕심이 많아 청강하는 수업이 몇 개 되고, 저녁때는 야학에 나가 검정고시 준비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영어와 글쓰기를 가르친단다. 시집이 돌아와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열심히 살고 있어서 기뻤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 먹으러 가다가 교정에서 그녀를 만났다.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 장학금 신청서에 첨부할 추천서를 써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부탁해왔다. 나는 추천서 때문에 반가워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마고 했다. 그녀는 요즘 무척 옹색하게 산다고 했다. 2000원으로 하루를 보내야 해서 밥 먹듯이 끼니를 굶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장학금만 받으면 한시름 놓을 거라며 밝게 웃는다. 그녀가 웃는 일이 많기를 바라며 추천서를 써줬다. 세 번째 만남이다.
며칠 전에 강의 마치고 나오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밝아졌다. 좋은 일 있냐고 물어봤더니 없단다. 더 이상은 물어볼 수 없었다. 대신 저녁을 사줬다. 요즘도 2000원으로 하루를 산다고 했다. 그런데도 신입생들이 귀여워서 밥을 사준단다. 야학에서 가르치던 아주머니들은 모두 검정고시에 붙었고 그 중 두 분이 대학에 진학했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계속 공부해서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한다. 몇 년 벌어서 몇 년 공부하고 또 몇 년 벌어서 몇 년 공부하면 될 거 아니냐며 웃는다. 성공하는 것에는 관심 없지만 가끔은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엄마한테서 연락이 오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단다. 이런 말을 할 때도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떤 운명이든 받아들이는 용기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힘든 유년을 보내서 또래보다 사려 깊고, 어려운 환경으로 자기를 단련시키고, 욕심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남들을 배려하는, 환한 얼굴로 운명을 맞이하는 그녀야말로 용기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어떤 학생을 안다. 학생을 만날 때마다 나는 참 많이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