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운 탐구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잠시 기억을 더듬어 수강 신청 시기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강의계획서와 에브리타임 강의 평가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내 흥미와 탐구 주제에 맞는가’가 아니다. ‘교수님의 평가 기준은 어떠한가’, ‘시험의 난도와 비중은 어떠한가’가 먼저다. 우리가 매 학기 수강 신청 전쟁을 뚫고 골라내는 것은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좋은 학점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요즘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성향이나 성실함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다.
먼저 학점은 장학금의 기준이 되고, 취업 서류에도 들어가며, 대학원 진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작은 숫자 하나가 당장의 생존과 미래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지적 모험을 권하는 것은 현실성 없는 말이다. 여기에 대학이 오직 취업을 위한 장소로 인식되는 풍토도 한몫한다. 취업의 길이 막막한 현실에서 그것과 무관한 학문적 탐구를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어려운 전공 심화 강의, 조별 토론이나 과제 비중이 높은 수업, 낯선 타 학문 분야의 강의에는 자연스레 손이 가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학점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되는 도전이나 모험을 조용히 포기하고 있다.
그 결과, 학습의 과정에서 실패가 빠져버린 것 같다. 조용히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는 강의실 풍경이 가장 단적인 예다. 모든 학문은 ‘왜’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이 개념이 성립하는지, 이 이론의 한계는 어디인지, 이론과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묻는 목소리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이 부분이 시험에 나오는지, 이렇게 쓰면 감점되는지를 묻는, 학점을 잃지 않기 위한 질문만 늘었다. 강의실은 점점 효율적으로 정답만을 습득하는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질문하거나 반론하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변화다. 한 학기의 실패가 학점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그 결과가 다음 가능성을 좁혀버리는 구조에서, 오답을 감수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교수자가 원하는 답을 파악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학점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학생들이 틀리길 두려워해 질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가장 단순한 해석에 불과하다. 조용한 강의실은 학생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지적 모험과 탐구를 위험으로 만들어버린 평가 구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아는 것, 손쉬운 것만으로 채운 길의 끝에 성장이 있을 수 있을까.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성장에는 인내와 실패가 따른다. 학습과 탐구의 본질은 틀려도 괜찮다는 데 있다. 직접 부딪히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배움의 본질이다. 나아가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은 반드시 어린아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강의 중 문득 떠오르는 다소 엉뚱하지만, 진심 어린 궁금증, 틀릴 걸 알면서도 용기 내어 의견을 나누는 태도. 그 모든 것을 무시하지 않고 강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다. 이 탐구의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남긴다. 자신의 언어로 질문을 만들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아낸다면, 그 개념은 비로소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물론 학점 관리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수업에 성실히 임해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학습이 아닌 학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을 때 문제가 생긴다. 학점은 배움을 측정하는 도구일 뿐, 배움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시험과 학점만을 위한 공부는 겉으로는 영리해 보일지 몰라도, 깊이 있는 탐구와는 거리가 멀다. 종강 후 손에 남은 것이라곤 그럴싸한 성적표뿐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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