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루틴이란 게 대개 이런 방식이다. 스마트폰 알람을 듣고 일어난 후 자는 동안 쌓인 알림을 확인한다. 몇 시간 전 도착한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언제 올라왔는지 모를 스토리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다. 또 언제 답이 올지 모를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소셜 미디어 속 사람들과 연결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는 셈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대화와 만남이 익숙해진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철도가 지역 간 연결을 통해 사람들의 만남을 촉진한 것처럼,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이전보다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과 우리를 이어 줬다. 이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전화번호 대신 SNS 아이디를 묻고, 연락도 카카오톡이나 다이렉트 메시지(Direct Message)로 주고받는다. 타인과 연결되는 속도와 빈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많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허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실제로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보고 싶었다”거나 “심심했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대화방에서 근황을 전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도 그 연결은 어딘가 공허했다. 우리는 언제든 실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진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젠가부터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물음이다.
언젠가 <투명 사회>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전이라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투명 사회’란 개인이 사회 속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회를 의미한다. 어쩌면 ‘전시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투명하길 강요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다듬는다.
소셜 미디어는 이런 투명 사회와 잘 맞는 무대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서로의 이야기와 모습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야기와 모습은 스스로 편집하고 선택한 이미지에 가깝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한 뒤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공유한다.
이전보다 연결의 기회는 훨씬 많아졌지만, 그 연결은 점점 얕아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딘가 외롭고 심심함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편집해 둔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보면 이를 쉽게 깨닫게 된다. 상대방의 얼굴과 표정의 미묘한 변화, 말의 속도와 높낮이, 가끔은 어색한 침묵까지. 스크린 너머로는 전해지지 않는 정돈되지 않은 불완전함과 어수선함이 정말 사람을 만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채팅에 비하면 분명히 비효율적이고 엉망진창인 대화지만, 그 불편함이 관계에 밀도를 만든다. 사람과의 관계는 분명 몇 문장의 메시지와 사진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깊다.
소셜 미디어는 연결의 수는 늘렸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얕아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사진을 주고받는 게, 입을 열어 말을 섞는 것보다 채팅이 편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소통과 관계가 너무 쉽고 편하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능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한때 많은 공감을 얻었던 ‘젠지 스테어’나 ‘텔레포비아’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전화 통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꽤 많다. 이제는 사람뿐만 아니라 AI와의 채팅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점점 더 가벼운 연결이 늘어나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이 과잉 연결이 우리 시대의 외로움을 덜어줄까?
필자의 답은 현재로선 ‘아니다’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별것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비록 어색하고, 느리고, 볼품없어도 바로 그런 것들이 관계를 성숙시키고 외로움의 빈자리를 채운다. 문득 스크린 속 세상에 지쳤다면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현실에 있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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