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으로 향하던 영국 해군의 수송함 버큰헤이드 호는 희망봉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바위에 부딪혀 침몰하게 됐다. 배에는 영국 해군들과 그들의 가족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640명가량이 되었고, 그중 130명가량은 부녀자들이었다. 그러나 배에 있는 구명보트는 단 3척이었고, 승선정원은 한 척당 60명으로 총 180명만이 탈수 있었다. 버큰헤이드 호의 알렉산더 시튼 선장은 병사들을 집합시켜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여자와 아이들을 구명보트에 먼저 태우고 너희들은 배에 남는다.” 배에 있는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병사들의 가족들이었고,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가족들을 구명보트에 태웠다. 그리고 선장과 병사들은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에 대한 진실성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재난 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를 먼저 구조한다는 불문율이 생겨났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승객을 먼저 챙겨야 할 선장과 몇몇 선원들은 제일 먼저 배를 빠져나오고, 안내방송만 믿고 객실에서 기다리던 그 꽃다운 아이들은....
참담함에 눈물이 흐르고, 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선장과 선원들에게 분노하고,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못 믿을 대처를 비판하고, 안전검사에서 결점 투성이 배를 합격통과시킨 관계 당국에게 비난을 쏟아본다. 비리의 검은 내막으로 ‘해피아’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안전 불감증의 문제, 사고 해운사 실소유주의 실체를 보면서 한숨을 짓는다. 그러다 다시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이 되고, 친구 잃은 아이의 심정이 되고, 조카 잃은 자의 심정이 돼 눈시울을 붉힌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있는 지금, 사고 원인과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알면 알수록 한심하고, 뿌리 깊은 ‘검은 커넥션’이 만드는 안전 불감증에 우리나라가 부끄럽다. 왜 우리는 이런 참담한 사고를 미리 막지 못하고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을까? 사고의 원인을 찾고 관계자를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반성하고 잘못된 관행과 법규, 시스템 등의 문제점들을 고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사고원인을 찾고 관계자만 처벌하면 끝나버린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똑같은 불행이 다시 찾아오면 똑같은 문제점이 다시 지적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데는 우리 언론의 책임도 크다. 사건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만 연일 관련보도를 쏟아낼 뿐, 어느 언론사도, 어느 기자도 문제점을 미리 탐색.취재하고 보도하여 참사를 예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만 문제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시간이 지나면 그 문제점이 어떻게 됐는지 끝까지 보도하는 언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언론이 사회 감시자로서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철저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지금이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들길 바라는 국민들의 소망이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길 바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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