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길을 건널 때는 손을 들고 건너야 한다고 배운다. 어제 본 한 어른은 아이의 손을 잡고 무단횡단을 했다. 아이는 어른의 손에 이끌린 채 왼손을 들고 길을 건넜다. 아이가 양심을 운운하며 건너길 거부한다면 어른은 바쁜데 왜 보채냐며 화를 내고 만다. 요즘은 이런 형태의 이중구속이 만연하다. 잘못은 아이들에게 없다. 아이들에게 양심적이고 선량한 삶을 살아야 하며 제도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강요하면서, 자신은 양심을 버리고 악한 마음으로 제도를 부수는 어른들에게 잘못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중구속이 지나치게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크게는 세계 2차대전에서 독일 나치에게 2천만 명의 국민을 잃은 러시아가 현재에 이르러 슬라브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신나치주의 세력 ‘스킨헤드’를 방관하는 것이 이중구속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작게는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중구속 이론을 응용해 상대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쪽의 페이스대로 끌려와 이쪽에서 제시한 선택을 하게 만들곤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세월호 특별법 통과에 관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유가족이 단식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가득 메운 시민들을 보여주면서, 나도 저 자리에서 저들에게 힘이 돼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유도한 것이다. 결국 모두가 만연한 이중구속의 이론에 속박당한 것이다.
결국 지난 9월 30일 세월호 참사 167일 만에 세월호 특별법이 타결됐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패배한 법’이라는 표현을 했다. 각종 언론과 SNS를 통해 세월호 유각족에 대한 동정여론을 형성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국 유가족들의 의견을 수용하느라 167일의 시간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여야 권력투쟁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위 깨어있는 지식인을 자처한 대학생들은 유가족과 함께 야당의 인형극에 기꺼이 인형이 돼주었고, 한 커뮤니티 사이트 회원들은 그들을 막기 위한 여당의 방패로 광화문 거리에 내세워졌다. 결국 유가족은 싸움판을 마련해준 미끼였던 셈이다.
이처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선 비상식이 쉽게 용인된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식적인 구성원들은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저항한다. 하지만 저항의 몸짓은 곧 타협과 수용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이 사회가 부조리극의 화법을 정식 국어교과목으로 채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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