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오늘날의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로 넘쳐나고 있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이 많은 정보를 터치만 하면 금세 우리 눈앞에 옮겨다 준다. 세상은 정말이지 하나가 돼가는 듯하고, 다가온 모든 정보는 나의 ‘자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에서 한국의 현실은 더욱 요동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19세기 말부터 지속된 현대사의 파행들, 일제침탈과 그에 이은 식민지화, 해방과 남북분단, 군사독재와 경제 산업화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IMF 파국 등을 거치면서 이 땅은 흔들릴 대로 흔들렸다. 그렇게 계속되던 나라 안팎의 외풍에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규범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게다가 인구는 많고 경쟁은 극심하여, 교육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또 밖에서 주어지는 대로 행해져왔다.
누구를 탓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사회의 현재적 상태는 우리 모두가, 윗 세대와 지금의 동시대인이 만들어 왔고 동시에 그에 시달려온 결과물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자. 우리가, 특히 젊은 세대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의 사회와 현실 그리고 집과 학교가 어떻다고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살아가고, 내 스스로 그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엄중한 요청이다.
우리 각자의 삶이, 생애의 막바지에서 보면, 결국 엑스트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옆에서 돌보는, 아니면 잠시 얼굴을 내비치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끝나는 삶을 우리는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탁자나 걸상 같은 ‘소도구’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고 어느 작가는 썼다. 하지만 각 개인은, 적어도 자기 삶에서만큼은 엑스트라가 아니다. 엑스트라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엑스트라여서도 안 된다. 다른 삶과 견주어서, 또 역사의 보다 큰 인물 주변에서나 큰 사건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며 끝날 때도 있다. 하지만 자기 삶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마땅히 그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
‘자기 삶을 살라’는 것은 사회적 기준과 평가들, 이른바 스펙이나 학점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 ‘이기적인 삶을 살라’는 뜻도 아니다. 그것이 ‘멋져 보여서’, 혹은 ‘도덕적이어서’ 그래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서의 각 삶은 유일무이하기에 대차대조상으로도 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수지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삶은 스스로 충실한 일이기에 ‘윤리적’이기도 하다. 가끔, 하루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자기를 돌보는 시간,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을 다독이고, 그럼으로써 질적으로 나아지는 내면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평생에 걸친 자발적 내면전투 속에서 비로소 습득된다.
내가 내 삶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묻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자기를 좀 더 높은 진선미의 수준에서 변형시킨다는 뜻이다. 비록 서투르고 때로는 위태롭지만, 매일매일 자기 삶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일만큼 놀랍고 두렵고 기쁜 일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변화된 자기, 좀 더 진실되고 선하며 아름답게 고양된 주체로부터 믿음과 사랑과 선의도 나올 수 있다. ‘선한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쓰지 않았던가? 모든 일의 크고 작은 의미는 자기를 잃지 않는 데서, 자기충실로부터 비로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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