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한 청년이 분신자살했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이었고 22살의 젊은 나이였다.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은 가난한 집안에서 맏아들로 자랐다. 여섯 식구를 데리고 상경한 그는 청계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때 마다 서울역과 평화시장을 기웃거리며 배운 재봉틀 기술 덕분에 재단관리사로 일하게 된다.
그는 평화시장 안의 빽빽하게 들어선 봉제공장에서 온갖 질병에 노출된 여공들의 모습을 보았다. 제대로 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근로자들이 모인 집회에서 ‘근로기준법’이라는 서적을 들고 불꽃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45년의 세월이 흘렀고, 점차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전태일은 잊혀졌다. 그나마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동상만이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번에 기자는 ‘설 곳 없는 마지막 싸움터’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중앙우체국을 방문 했다. 그 곳에 있는 노동자들이 바라는 것은 따뜻한 옷가지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왜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들어줄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관심에 대한 그들의 바램은 그들이 전광판에 오르는 큰 동기가 되었다.
취재준비를 위해 필자가 관련기사를 검색했을 때, 관련기사에는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물음부터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필요가 있냐는 회의론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판자를 덧대 간신히 찬바람을 피하며 잠을 청하고 있는 고공농성자를 보면서 필자도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목숨을 받쳤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너무도 쉽게 잊혀진 것처럼 ‘고공농성’도 결국은 의미 없는 행동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바꾼 건 우연히 읽은 <전태일 평전>이었다. 여공들에게 버스비 주고 자신은 걸어서 퇴근할 정도로 그는 마음씨 고운 착한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언론사와 기관의 외면으로 느꼈을 좌절감과 답답함에 필자는 공감이 되었다.
필자는 평전을 다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분신자살’과 ‘고공농성’은 한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일 수 있다. 이는 “대중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고 한 사회학과 교수님의 인터뷰처럼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들이 고공에서 사다리를 내릴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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