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이 중간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와 학원에 가면 선생의 지시에 따랐고, 집에 가면 부모의 말씀에 따라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니 ‘이제 자유롭게 되었으니 스스로 책임지라’고 했다. 자유와 책임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고, 그래서 당혹과 혼란 속에 좌충우돌 보내다 보니, 벌써 졸업할 때가 되었다.”
아마 이런 사정은 여기 이 땅의 대학생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학교생활에서의 경쟁도 심하고, 취업전선에서의 스펙 압박도 갈수록 더해간다. 그렇지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 맞는 삶은 무엇이고 어떤 성향과 목표를 지녔는지에 대한 물음은 부족하거나 없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무런 방비 없이 사회로, 이 살벌한 생계의 현장으로 내던져진다.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의 소설 가운데 <특성 없는 남자>가 있다. 그는 20세기의 그 어떤 작가보다 더 철학적인 사유를 펼쳤기에, 그 작품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그 핵심 전언의 하나는 ‘현실감각(Wirklichkeitssinn/sense of reality)’과 ‘가능성의 감각(Möglichkeitssinn/sense of possibility)’이다. ‘현실감각’이 있는 혹은 일어난 일에만 주목하는 것이라면, ‘가능성의 감각’이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 것 같은 것에도 주의하는 일이다. 작가의 강조점은 물론 가능성의 감각에 있다. “현실 감각이 있다면, 가능성의 감각도 있어야 한다.”
가능성의 감각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따라서 기존과는 다른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보다는 그 배후와 전체 지평을 더 고려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꿈과 상상력의 일이고, 그래서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소질에 가깝다. 바로 그 때문에 거꾸로 ‘쓸모없거나,’ ‘비현실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능성의 감각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더 넓은 시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의 많은 통찰, 예를 들면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다”거나, “왜 세상은 모든 비본질적이고 좀 더 큰 의미에서는 진실하지 못한 말들을 섬뜩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일까?”는 이렇게 해서 나온다.
우리가 누구인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하여 지금 살아가는 이 삶이 살만한 것인지, 그래서 결국 의미 있는 것이 될 지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그 물음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평생 던져야 하는 것이지만, 특히 독립적인 삶이 시작되는 20대에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대학생활이란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저쪽으로도 갈 수 있지만, 그 양쪽과 전혀 다른 삶도 꿈꾸고 기획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마땅히 ‘가능성의 탐색시기’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야말로 오로지 자기에게, 자기 자신의 내면적 목소리에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기인 까닭이다. 이때를 넘기면 우리는 다시는, 아마 죽음이 찾아오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스런 체험을 갖기 전에는 그런 근본적 모색기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있을 때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듯이, 죽을 때조차 죽어가는 이유를 모른 채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부단히 묻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자기로부터 나오는 이 내적 근거 없이 살아간다면, 이 삶에서 받아들인 모든 믿음과 원칙 그리고 의미는 그리 참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크게 배우는 사람(大學生)’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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