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순조롭다했다. 늘 마감이란 긴 여정에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또 잊어버렸다. 바보같이. 기사를 퇴고하면서도, 오타를 교열하면서도 문득문득 자꾸 무언가 고개를 내민다했다. 이 골칫거리는 바로 기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이름, 제목이다.
오늘도 역시 셀 수 없이 많았던 가제는 모두 퇴짜 맞았다. 과연 어떤 제목이 기사를 대표할 수 있을까 지금껏 나온 제목들을 줄을 세워본다. 하지만 성에 들어차지 않는다. 고개를 쥐어박고 고민에 빠져있는 기자들은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온다. 제목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처음 신문사에 입사한 그날도 그런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기사 쓰는 실력이 늘어났다면 언제나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던 것은 제목 짓기다. 어떨 때는 제목을 박박 지우고 공백으로 남기고 싶다.
그래서 오늘 칼럼 제목은 ‘무제’다. 국어사전에서 표현된 무제는 ‘흔히 시나 그림 따위에서 제목을 붙이기 어려운 경우에 제목 대신에 사용한다’고 한다. 진짜 그렇다. 지금 이 기사에 제목이 ‘무제’인 것도 단지 제목 붙이기가 힘들어서 일 수도 있지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왜 제목 없음의 미학이라 하지 않는가.
존재하지 않는 제목이 불친절해 보일 수 있다. 시간에 쫓겨 사는 현대인에게는 뉴스의 헤드라인이란 세상살이를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신문도 그렇다. 고심 끝에 나온 한 기사의 제목은 늘 마감 3일 동안 나를 쫓아 괴롭히다가 마침내 끝에 가야만 나온다. 제목에 쫓기는 것은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처음 기사를 읽기 전 제목을 보고 이 기사를 읽을지 말지 걱정하고, 제목의 영향력이 기사의 끝, 기자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쫓아온다.
때문에 제목을 잘못 지으면 독자의 상상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기사 내용을 반영하지 못하는 제목은 독자가 기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미술 전시품이나 문학에서 무제의 인기가 식지 않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편한 것도 오늘 하루뿐이다. 다음 마감이면 다시 제목 정하기의 지겨움에 연속일 것이다. 앞으로도 제목의 늪에 빠져들어 허우적댈 나와 동료 기자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쳐보련다. 충북대신문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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