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프랑스에서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 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7개월 만에 200만부가 팔렸고, 1년 만에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400만 명이 넘는 독자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 책은 어떤 심오한 학문적 분석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흥미로운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이 소책자에서 우리에게 ‘분노하라’는 간명한 메시지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요청은 그가 목도하고 있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외교관을 지내면서 1948년 유엔에서 채택된 <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바 있는 93세의 이 노전사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는 견디기 힘든 그리고 견뎌서도 안 되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경쟁으로부터의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투쟁과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낸 사회보장제도, 이민자들의 인권, 공공 교육제도 등이 하나씩 와해되고 붕괴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이 노전사가 이룩하고자 했고 꿈꾸어왔던 사회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현실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가 주목했던 현실은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 흔들리고 파괴된 우리의 삶이 아니라,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이 기이한 상황, 분노하지 않는 사회였다.
분노는 사람들이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 즉 ‘마음의 움직임’에 속한다. 움직이는 마음은 사물들을 찬찬히 따져 보는 마음과는 다르게 섣부른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평정된 마음으로 사태를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류의 충고는 흔히 들을 수 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하라고. 그러나 이 충고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분노의 감정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각, 즉 문제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탐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것으로 향하게 하는 감정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이 없다면 어떤 종류의 판단이나 인식도 성립할 수 없다. 관심이 없거나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지스탕스의 노전사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부재하고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분노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우리의 생존과 삶을 더욱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하나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독재적 발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 대학을 직업훈련소로 전락시키고 있는 일련의 대학 정책 등은 과거 우리 사회가 성취한 민주화와 다양성의 가치들을 무화시키고 있다. 이 현실 앞에 우리는 여전히 인내의 미덕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가?
분노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한다. 욕망이 약하거나 없다면 분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욕망은 어떤 욕망인가? 그것은 자신에 삶에 대한 사랑, 자신의 삶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삶을 황폐화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에 인내할 수 없다.
자신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은 누구나 분노할 줄 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좀 더 사랑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고인이 된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쎌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청했던 것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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