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나 저제나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정보도 많아지며,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듯하다. 도시에서의 삶은 더 그렇고, 한국에서의 그것은 더더욱 그렇다. 좁은 땅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사는 까닭이다. 그러니 경쟁은 피할 수 없다. 또 경쟁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몽골 같은 초원에서 양을 키우며 시류와 무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생존경쟁은 불가피해 보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대로 된 삶을 위한 원칙은 무엇일까? 아니 그런 원칙 이전에 이 원칙이 있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칸트(Kant)와 푸코(M. Foucault)에 기대어 잠시 생각해볼 수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라는 글에서 칸트는 ‘계몽’이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기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계몽된 인간이란 자기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사용된 이성에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감히 알려고 하라)”의 정신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미성년의 상태,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올바로 자라나지 못한 상태에 머문다.
푸코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칸트가 제기한 계몽의 정신이 근대철학 200년 동안 되풀이되었다는 것, 근대 이후의 철학이란 칸트가 던진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시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계몽의 근대성은 ‘역사의 한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attitude)”이고, 현재를 기존과는 ‘다르게’ 상상하고 변형하려는 열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근대인(modern man)’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문명의 현대적 이기(利器)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고 그 이성에 책임지면서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것은 자기를 자율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과 다를 수 없다.
나는 어떻게 나를 자율적 주체로 구성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다. 이때 나의 관계란 두 가지, 대상에 대한 나의 관계와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로 나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나의 관계가 나의 ‘밖’으로 향한다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나의 ‘안’으로 향한다. 여기에서 중심은 안의 관계다. 왜냐하면 외면적 관계 역시 내면적 관계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도 내가 나에 대해 맺는 이 관계의 성격 그리고 그 수준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율적 주체의 구성가능성도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의 성격으로부터 온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가 규정되듯이,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나는 두 발을 스스로 내디딜 수 있고, 반대로 ‘자기를 붙들어 매는 수레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는’ 말과 같을 수도 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그 노예가 되는가는 내가 나에 대해 맺는 관계의 방식에 달려있다. 오늘을 사는 사람이 이성을 책임 있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전근대적 미성숙을 반복할 뿐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현대인’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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