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세계는 이제, 국내외를 막론하고, 차분한 정신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급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과학의 문제 그리고 그 바탕으로서의 교양교육의 문제를 정리해보는 것은 쉽지 않다. 또 그것은 이미 자주 다뤄졌으므로 구태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학기부터 이른바 ‘코어사업’이 시작되니, 다시 검토할 만해 보인다.
첫째, 인문적 교양교육은 무엇보다 개인을 향해 있고, 이 개인의 감성계발에 초점을 둔다. 그렇다고 사회나 공동체의 문제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삶의 사회정치적 조건이 중요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문학의 1차적 무게중심은 ‘개인’이고, 이 ‘개인의 건전성’이다. 시민이란 건전한 시민에 다름 아니다. 개인이 건전한 삶을 산다는 것은 건전한 감성과 사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고, 그래서 개인성의 훈련은 곧 건전한 주체성의 훈련이다.
둘째, 그러나 감성의 훈련은 감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감성은 사고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진다. 감성은 사고의 논리에 의해 단단해져야 한다. ‘체계화’는 이렇게 이뤄진다. 논리화된 체계로서의 사고는 다시 감성으로, 나날의 다른 경험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감성훈련과 사고훈련은 함께 간다.
셋째, 개인은 풍부하게 느끼고 정확하게 생각하는 방법을 익힘으로써 무엇보다 ‘자기 삶’을 충실히 사는 법을 배운다. 이때 ‘충실히 산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이렇게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뜻한다. 참된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율(紀律) 혹은 원칙이 생긴다. 사회 전체의 바른 삶은 오직 각 개인이 자기 삶을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는 원칙 말이다. 개인의 자각된 삶은 이처럼 공동체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넷째, 인문과학은 문학예술이든, 철학이나 역사든, 건전한 개인의 사회적 확대과정을 북돋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과학에서처럼 현실의 설명과 진단에 자족하지 않는다. 또 자연과학에서처럼 가설과 결과 사이의 편차나 일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인문과학의 방법은 각자가 행한 자발적 선택을, 그것이 그르지 않는 한, 존중하고 장려한다. 그 어떤 가르침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거나, 밖으로부터 주입되거나 혹은 위로부터 명령되지 않는다. 이런 자발적 형성(Bildung)의 과정은 일평생 계속된다. 인문교양의 과정이란 자발적 자기형성의 과정이다. 이것은 교양교육에서 이뤄지는 작품, 저술, 사료에 대한 토론과 비판적 공감 속에서 학습된다.
다섯째, 이 네 가지 사항이 나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넓고 깊은 삶’이다. 인간의 삶은 그 나름으로 중요하면서도 각각은 ‘하나의 실현태’ 혹은 경우일 뿐이다. 그에 비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가능성의 세계는 얼마나 크고 넓은가? 인간은 깊은 의미에서 ‘가능성의 존재’이고, 그 삶은 ‘가능성의 삶’이다. 인간의 삶은 상하좌우로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 위에서 하나의 작은 점이다.
우리의 감각과 사고는 이 무한한 삶의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지평이란 곧 사물의 질서이자 자연의 질서다. 이 질서에 열려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윤리적’이다. 그 가능성 속에서 편견과 독단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마음은 비로소 자유롭다. 결국 교양교육의 목표는 넓고 깊은 가능성의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의 자유로운 삶이며, 이 삶을 향한 유연한 정신이다. 아마도 이 열린 마음 속에서 각 개인은 다른 개인과, 언어나 민족, 문화나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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