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F. Kafka)의 글 가운데 <법 앞에서>(1915)라는 짧은 산문이 하나 있다. 이 글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법 앞에 선 문지기에게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문지기는 “나중에는 가능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대답한다. 문은 늘 열려있으나 시골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답답해진 그는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사정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문지기는 자기가 “가장 최하급이고”, “방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더 힘센 문지기가 서 있다”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몇 달 몇 해를 기다리며 부탁하지만, 문지기의 답변은 똑같다.
그럼에도 시골 사람의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문지기를 관찰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고, 불평하거나 심지어 매수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문지기의 외투 속 벼룩에게 청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시골 사람의 몸은 점점 더 굳어가고, 시력도 약해진다. 그는 이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다. 앞을 분간하지도 못한다. 그의 마지막 질문은, “모두가 법을 얻으려고 애쓰는데”,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외에 누구도 들어가려고 갈망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정해져 있다”고 문지기는 답하고 떠난다.
카프카의 글이 지닌 의미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법 앞에서>도 그렇다. 법은 누구나 찾아 헤매는 삶의 출구이자 통로일 수도 있고, 구원이나 행복의 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유나 정의 혹은 진리 같은 보편적 가치일 수도 있다. 더 줄이면, 진선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법 앞에서’는 ‘진선미의 문 앞에서’ 쯤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이 일평생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선미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문 앞에서’ ‘일평생 어슬렁거리다가’ 그 삶을 마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선미의 추구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기 삶을 사는 일이다. 진선미도 자기 삶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충실의 삶으로부터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의 삶’이라고 불리는 것도 대개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빌려온 말과 유행하는 관념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각자의 삶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시골 사람의 저 허다한 시도가 보여주듯이, 평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설령 노력한다고 해도, 그 결실은 ‘나중에 가능할 수 있으나 지금은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마저 없다면, 삶은 상투성의 반복강제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무의미는 영속한다. 지루하고 한심하며 헛된 것만 살아남는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이 지금 겪는 어려움은 작지 않다. 이 어려움이 이전 세대에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세대적으로 반복되는 종류일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점증하는 변화속도와 경쟁압박으로 더욱 가중되고, 또 어떤 어려움은 그 압박에 무방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긴급한 것은 물론 생계수단의 확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이 생계의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람과 의미를 찾는 일이고, 그런 보람 속에 자기 삶을 사는 일이다.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노력 외에 대체 무슨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이 있을 것인가? 삶에 대해 스스로 묻고, 이 자기물음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식을 조직해 간다면, 나는 이미 살 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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