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관찰에서 나온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요컨대, 사과라는 것은 이 지구라는 둥그스름한 행성 어디에서든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말레이시아든, 스페인이든, 브라질이든, 영국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해낸 사람은 뉴턴밖에 없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모든 발견들은 그런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그것을 느끼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물의 모든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주위에서 항상 우리의 ‘창의력’이라고 부르는 현대의 메시아를 깨우려고 곳곳에서 손을 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번쩍 든 손을 너무나도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 과거에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인간 문명의 정점에 다다를 발판이자, ‘문명화’의 중심에 있는 모니터라는 것을. 수십만의 픽셀과 그 픽셀이 띄고 있는 갖가지의 색깔들, 그리고 그것들이 비와 흙이 하나되듯 하나의 ‘색’으로 어우러져 있다는 실체를. 하지만 또한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문명화’됐다고 여기는 세상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흔해빠진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앞서 말한 모든 신비로운 관점보다 더욱 강력하다. 바로 이 인간 심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강력함, ‘평범함’의 강력함이 우리들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이다. 어제 봤던 것이고, 앞으로도 볼 것이고. 인간은 대부분 그것들이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인가?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메타포다.
흔해 빠진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지겨움’의 인식. 그것이 우리의 ‘창의성’이라는 메시아의 현신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또한 ‘지겨움’은 역시 ‘창의성’을 현신하는 새로운 발판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지겨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혹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차이가 이런 극명한 목적의 구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겨움’은 본래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인간의 원초적 ‘특권’이다. 니체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영원회귀’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통한 해탈의 경지가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워 보이는 것은 이러한 ‘특권’을 놓지고 싶지 않은 우리들 내면의 저항이다. 이 ‘특권’의 용도는 ‘지겨움’을 통해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지금의 우리들은 이 지겨움마저 ‘특권’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변해 버렸다. 지겨움의 올바른 인식이 부재하면서, 우리들이 ‘항상 보는’ 사물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남겨졌고, 저건 저렇고, 이건 이렇다는 수동적인 생각은 우리의 인식 구조를 지배한다. 그리고 이제, 빅데이터가 세계를 지배하는 현대에서 더 이상 ‘왜?’라는 ‘특권’의 정직한 활용이자 ‘능동성’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단지 ‘창의적’ 미래가 아닌, 빅데이터가 암시하는 정해진 미래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발견하고자 하는 관찰은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빅데이터로 컨트롤되는 미래에 저항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정보의 물살로 사유, 사고의 시간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수많은 학자들이 경고했던 그 미래는 이미 현실이다. 그리고 점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불필요해지고, 등장해도 다시 한번 역으로 전환되어 빅데이터의 효율적인 움직임을 조장할 뿐이다.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시 관찰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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