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변하고, 매일 보고 듣게 되는 정보량도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해가고 있다. 이 땅의 현실은, 북핵 실험에서 보듯이, 크나큰 위협 속에 있고, 여기에 인구밀도 조건도 좋다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이렇게 좁은 땅에 이리 많은 사람이 이처럼 혹독한 경쟁 속에 사는 곳도 세상에 드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청년들이 제 삶을 개척해 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기성세대는 많은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대학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언이나 가르침이란 것도 주체와 대상 사이에 20∽30여 년의 격차가 있는 만큼 세대적 간극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취향이나 태도, 생활방식이나 관심사에 있어 각 세대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다르게 겪고 느끼며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에, 가치관 차이는 불가피하다. 세대 간의 의사불통이나 가족 안의 불화도, 옮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의 문제이기 이전에,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고, 그러니만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모든 세대는 그 세대 나름으로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듯이 세대를 구성하는 각 개인도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개인은 자기 삶을 처음으로 시작한다. 부모 혹은 조부모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조건과 자신의 성향과 재능과 기질에 따라 그는 완전히 새롭게, 그래서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그 삶이 간단하거나 손쉬울 수 없다.
인간이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말해, 삶이 ‘주체(subject)의 주체화’ 과정임을 보여준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삶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인으로서 끌고 가는 것, 그래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그 결정에 책임지면서 적극적으로 삶을 조직해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삶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채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바퀴를 ‘스스로 밀고 끌며’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주체의 주체화란, <중용(中庸)>에 기대면, “널리 배우고 상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하게 변별하고 돈독하게 행하는(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것으로 이뤄진다. 박학, 심문, 신사, 명변, 독행은 유학에서의 ‘다섯 가르침(五敎)’이다. 퇴계 선생이 1568년 68세의 나이로 왕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오교였다. 그러니까 나라의 단속과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는 일 외에 ‘배우고 물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왕 자신의 공부이길 갈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퇴계 선생 자신의 삶의 원칙이기도 했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제자 김성일(金誠一)에 따르면, “좀더 나아지려는 마음(向上之心)”을 실천했던 것 같다. “선생은 터럭만큼도 자만하여 거짓으로 있는 마음이 없으셨다. 향상하려는 마음이 죽는 날까지 한결 같으셨다.(無一毫滿假之心 向上之心 至死如一日)”(퇴계 언행록)
모든 인간이 저절로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가만있어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일평생 노력해야 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묻고 생각하며 구분하고 행하는 가운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치 벽돌이 하나둘씩 쌓여 집이 지어지듯이, 단계적으로 구축되어간다. 삶은 각자의 자발적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다. 학문사변행(學問思辨行), 그것은 삶의 주체적 조직방식이고 자유의 실행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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