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 첫 문장이,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 혹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도시의 전부다. 말테의 고향에서는 개인의 죽음이 주위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이 바뀌기도 한다. 여동생이 죽고 난 뒤의 말테의 어머니도 그랬고, 말테의 어머니가 죽고 난 후의 할머니도 그랬다. 그러나 도시는 다르다. 개인의 삶의 이야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이 죽음을 대량 생산하는 곳이다. 부자들의 죽음은 병원에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곳곳에서 넘쳐난다.
또한 그것은, 덴마크의 고향에서 나와 처음으로 세계를 접한, 말테가 마주본 세계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말테의 말대로, 말테는 유년의 뜰을 지나 대도시에서 세계를 본다. 세계는, 살기 위해서 태어나 죽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곳이라고, 몸소 느끼게 된다.
그에게 도시는 비정하다. 무의미한 것, 타락한 것, 혹은 그와 비슷한 모든 어둠들이 음탕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어우러져있다. 거기에 가난과 고독 역시 말테를 괴롭힌다. 도시의 사람들은 이런 죽음과 관련된 혹은 죽음이라는 중심을 위성처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말테는 ‘보는 법’을 배운다. 이 끔찍하면서도 비정한 현실에서도, 모든 것들에게 통용되는 존재성을 보는 것, 그것이 자신이 시인이며,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 시인의 역할이라고 말테를 통해 릴케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존재성을 보기 위해서, 이 도시의 실상을 확인하고,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 그것 역시 시인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마지막 탕아의 이야기로 가서야, 릴케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인지 말해준다. 성서에는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가 있다. 유산을 미리 받은 작은 아들이 출가해,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비난을 감수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전과 같은 아버지의 환대에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말테는 이 이야기를 달리 해석한다. 삶은 운명보다 더 위대하기에, 사랑받는 운명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삶을 찾고자 떠난 탕아가, 밖에서도 사랑과 연민만을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가족들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받는 당사자인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릴케는 이 책에서 절망과 고독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속에서 ‘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신은 인간에게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구속시키지 않게 만든다. 사랑을 운명이 아닌 삶에서의 선택으로 바꾼 것. 인간의 본질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제한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릴케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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