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란 무엇인가? 이런 주제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이었다. 물리적으로는 도시의 발전과 연계하여 접근해볼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는 대학의 변천과정을 정리해볼 수도 있고, 현재적으로는 시대가 바라는 대학상을 재정립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의 이념으로 ‘왜 대학이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동양어권에서 대학(大學)은 소학(小學)과 반대되는 것으로, 소학이 단순히 글(꼴, 소리, 뜻) 을 배운다면 대학은 사람을 배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 나아가 온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서양어권에서 대학은 보편학(the universal)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니버시티’(university)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때의 보편학은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보편적 원리를 탐구함을 가리킨다. 분과(分科)로 나누어지는 기능의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배워야 할 보편적 가치와 그 소통의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 어법에서는 가볍게 종합대학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래 대학의 이념에서 많이 벗어나있다. 과학기술주의가 만연하면서 자본의 물결 속에서 대학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대학의 근본정신을 지탱하던 학문이 대학을 떠나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시대가 습격해온 것이다. 중 없는 절이 없는데도, 수도를 하는 이판승(理判僧)이 설 자리를 잃고 살림을 하는 사판승(事判僧)이 자리 잡는다. 그러하여 마침내 이판사판(理判事判)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과연 오늘 국립대학의 역할이 무엇일까 물어본다.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대학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돈에 휘둘리고, 정치에 휘둘리고, 관료에 휘둘리는 대학은 진정한 학문을 하기 어렵다. 교육부의 정책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지 학문의 제1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순수기초학문이 보호되어야 한다. 바탕 없는 건물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순수학문을 몰살시키는 분위기에서 국립대학은 인문학과 자연학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순수인문학과 기초자연학이야말로 국립대학의 몫이다.
셋째, 국립대학 연합 체제를 좀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각 도에 하나씩 배치되어있는 거점국립대학은 지역맹주로서의 위상에만 고집하지 말고, 전국적인 단위에서 경쟁력이 있는 학문단위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부분적으로 ‘국립대학 공동입학 및 공동학위제’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교수의 질적 위상을 위해 진정한 종신교수제를 모범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서양권에서의 종신(終身; tenure)의 의미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다. 30년간 쌓아온 학문이 무너지는 것도 아쉽지만, 말 그대로 ‘죽도록’ 연구에 매진하는 교수에게 부여하는 이 자격은 교수의 학문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고 투철하게 한다.
다섯째, 통일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가르치고, 과학기술의 기초와 응용을 가르치는 역할을 국립대학에서 먼저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단순한 산업적 발전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급변하는 사회상과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그것은 결정될 수 있다.
통일은 국립대학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호기다. 통일을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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